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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㉚ 오 마이 달링 클레멘타인

입력 : 2015-12-21 12:30:00
수정 : 0000-00-00 00:00:00

오 마이 달링 클레멘타인

 

아메리칸 포크 송 가운데서 한 때 우리 중등학교 음악 교과서에까지 실려 널리 알려진 곡이 ‘오 마이 달링 클레멘타인"이다. 이 노래가 불리기 시작한 것은 1863년과 1884년부터라는 두 가지 설이 있지만 미국의 ‘국민가요"의 반열에 들어가게 된 데는 1941년에 빙 크로스비란 포크 가수가 이 노래를 불러 빌보드차트 20위에 올리면서부터였다.

 

1848년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금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몰려갔다. 서부로 몰려가는 마차 행렬과 원주민 인디언과의 충돌, 인디언을 야만적으로 몰아내는 서부극의 플롯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다. 1849년 한 해 동안에 금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몰려간 인구가 약 30만 명이라고 하고 이들을 일컫는 명칭이 forty-niners(49년에 몰려간 사람들)였다. 이 때 광부들의 생활을 묘사한 노래가 ‘오 마이 달링 클레멘타인"이다. ‘산 속 광산에 금을 캐는 광부가 살았다네, 그는 포티나이너이고 클레멘타인이란 딸 하나가 있었다네. 내 사랑 클레멘타인 너는 어디로 갔느냐?". 원 가사의 2절에서는 클레멘타인의 못생긴 외모를 조롱하는데 1840년대에는 이런 뒤집기식 풍자 노래가 유행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노래는 우리나라에 소개되면서 가사의 내용이 전혀 엉뚱하게 바뀐다. ‘넓은 바닷가 외딴 오막살이에 고기 잡는 늙은 어부가 클레멘타인이란 어린 딸 하나를 데리고 살았다네...." 아마도 가사를 번안한 작가가 포티나이너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그 역사 배경을 전달할 적절한 표현 방식을 찾지 못했던 탓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노래는 우리에게는 집나간 어린 딸을 애절하게 그리는 늙은 홀아비 어부의 노래가 되어 버렸다.

 

노래 가사의 내용이 외곡된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우리는 미국 서부개척사의 어두운 면을 거의 모른다는 점이다. 캘리포니아는 1850년에 미국의 한 주로 연방에 가입했고 1869년에는 미대륙 횡단 철도가 완성되었다. 초대 캘리포니아 주지사 피터 베넷은 인디언에게 주어진 선택은 멸종과 이주 가운데 하나뿐이라고 선언했다. 한 때 70만 명으로 추산되던 캘리포니아지역 인디언 인구가 1845년에 이미 15만으로 줄었고 1890년에는 겨우 2만 명만 남았다.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인디언의 머리껍질을 현상금을 주고 사들였다. 이것이 아름다운 클레멘타인이 살던 시대의 한 면이었다.

 

 

 

박종일(지혜의 숲 권독사)

 

 

#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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