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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144) 어떤 조선족 동포(2) 깐수 정수일

입력 : 2022-11-30 03:07:16
수정 : 2022-12-07 03:47:24

이해와 오해 (144)

 

어떤 조선족 동포(2)깐수 정수일

 

  

 

 

  

 

                                                                     저술가,번역가  박종일

 

복역기간 동안에도 정수일은 저술 작업을 이어갔다. 그는 20008월 광복절 특사로 출소하였고, 20034월 특별사면 및 복권되어 학교로 돌아와 연구생활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고, 5월에는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2008년에 그는 한국문명교류연구소를 설립하였고 지금까지도 아랍지역과 이슬람문화, 그리고 유라시아 실크로드에 관한 수준 높은 연구 성과물을 꾸준히 내놓고 있다.

그는 이제 문명교류사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여러 개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한다. 식민지시대에 만주에서 조선인으로 태어난 성장한 정수일은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를 자유롭게 구사한다. 그는 이집트 유학생활을 통해 아랍어에 능통하며 평양에서 교수생활을 통해 영어와 러시아어를 배웠다. 아랍문화와 역사를 공부하면서 독일어, 프랑스어, 페르시아어를 마스터하였다. 모로코에서 중국 외교관 생활을 하는 동안에 스페인어도 배웠다. 현재 북한에는 그의 전처(모란봉극장 안무지도자)와 세 딸(첫째 딸은 평양시당 선전부에서 일하고 있으며, 둘째 딸은 조선중앙통신사 기자, 셋째 딸은 무역회사에서 일하고 있다)이 있다. 정수일은 (북에 있는 처자의 안전을 생각하여) 전향을 거부했다.

그는 신분 위장을 위해 서울에서 남한 여성과 결혼했다. 남한의 아내는 그가 체포될 때까지 아랍인인 줄 알았을 만큼 그의 위장은 철저했다. 정수일은 감옥에 들어간 뒤 남한의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며 잊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남한의 아내는 그를 버리지도 잊지도 않았다.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정해진 날에 감옥으로 면회하러 오는 그녀의 정성에 감동한 그는 결국 전향서를 제출했다.

그의 생애를 통 털어 볼 때 베이징에서 공부하던 시절이나 평양에서 일할 때도 그는 항상 주변 사람들이 선망하는 엘리트였다. 그러나 자신의 몇 차례 선택 때문에 그는 굴곡 많은 인생행로를 걸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행운아이기도 했다. 1950~60년대에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갑산파, 연안파, 소련유학파를 제거하고 일인체제를 수립하던 시기였다. 정수일과 함께 북한으로 돌아온 많은 조선족 엘리트들은 종파분자로 몰려 숙청되었으나 정수일은 학문적인 능력과 간첩훈련 덕분에 액운을 면했다. 남한에서 체포되었을 때도 민주화된 이후였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죽음을 면했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짧은 수형생활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201111, 77세의 정수일은 50년 만에 고향 연길시(현재는 용정시)를 찾았다. 모교는 그가 개교 이래 처음으로 베이징대학에 진학한 두 명의 졸업생 가운데 한사람임을 알아내고 그의 사진을 학교 자료관에 걸었다(다른 한 사람은 베이징 대학 철학과에 입학했고 그와 함께 북한으로 돌아간 뒤 사회과학원에서 일하다가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 정수일은 연변에서 누님(당시 83)과 남동생, 여동생 그리고 조카들을 만났다. 그와 형제자매들은 함께 부모님의 묘소를 참배하고 통곡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죽는 날까지 아들의 귀가를 기다리며 대문을 걸어 잠그지 않았다고 한다. 1961, 그는 북한으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고향집을 찾아 어머니를 만났다. 연변의 가족들을 다시 만났을 때 정수일은 조카와 조카손자들 가운데 몇 명은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가슴 아파했다.

그는 1997년 옥중에서 남쪽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한스런 분단의 비참과 불행은 나 같은 기성세대가 업보로 감수하는 것으로 족하고, 더 이상 우리의 후대들에게 전가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 절절하오. 바로 이 소망 때문에 나는 젊은 시절에 내 앞에 펼쳐진 양양한 전도와 영화를 주저 없이 버리고 나름대로 험한 가시밭길을 걸어왔던 것이오. 세계사에서 높은 자존과 존엄을 지켜온 민족 가운데서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허리 잘린 채로 고난의 삶을 살아가는 민족은 이 나라, 이 땅밖에 없소.....이땅의 분단이 지속되는 한, 그 누구도 그 어떤 나라도 우리민족을 우러러 보지 않을 것이오. 우리 역시 그 누구에게도 우리 자신을 자랑할 자격과 면목이 없는 것이오.” 시인 고은은 만인보(萬人譜)에서 북으로 돌아갈 수 있어도/가지 않고그냥 대한민국 국민의 하나로/굽은 소나무같이 살아가는” ‘깐수정수일이라고 표현하였다. 뉴스위크는 그를 "분단시대의 불우한 천재학자", "문명교류사의 세계적 권위자"라고 평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16권의 저서와 4권의 역서를 냈고 고령에도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1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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