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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147호) 마지막회 - 변절자들의 변명- 최린과 이광수

입력 : 2023-03-31 02:39:58
수정 : 2023-03-31 02:42:33

이해와 오해 (147) 마지막회

 

변절자들의 변명- 최린과 이광수

 

                                                                                  자유기고가, 번역가 박종일

   

 

천도교 교단 활동하다가 대동방주의내세운 최린

최린(崔麟)(1878~1958?)1878년 함경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구한말 대한제국의 하급 관리로 활동하다가 1904년 황실 특파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남선(崔南善) 44명과 함께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1909년 귀국한다. 191010월 손병희를 찾아가 정식으로 천도교에 입교했다. 천도교단에서 보성학교를 인수한 후인 19112월 보성중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193월 조선 민족대표의 한 명으로 3·1독립선언에 참여해서 일약 사회적 지도인사로 부상했다. 3년간 옥고를 치르고 192112월 출소해 19221월부터 천도교 중앙교단에서 간부로 선출되어 교단활동을 시작하여 같은 해 9월 종리사(宗理師), 1925년 종법사(宗法師), 1929년 교단 최고직인 도령(道領)에 올랐다. 1931년부터 1936년까지 천도교 교단 고문으로 재임했다. 그동안 조선사회의 민족대표로서 여러 가지 의미 있고 중요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다가 1933년 말 대동방주의를 내세우면서 친일 반민족행위에 나선다. 1934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되었고 1938년 조선총독부 어용 기관지인 <매일신보> 사장이 되었다. 이때 사용했던 창씨명은 '가야마 린(佳山麟)이다.

 

최린, “부득이 나의 정조를 팔았다친일행적 시인하고 사죄

19491월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재판과정에서 최린은 자신의 친일행각을 시인하고 재판장과 방청객들 앞에서 솔직한 참회를 보였다. 그는 재판정에서 최후 변론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민족대표의 한사람으로 잠시 민족 독립에 몸담았던 내가 이곳에 와서 반민족 행위를 재판을 받는 그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광화문 네거리에 사지를 소에 묶고 형을 집행해 달라. 그래서 민족에 본보기로 보여야 한다.”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변절의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당시 내가 택할 수 있는 길은 해외도피, 자살, 항복 세 가지였다. 유일한 자식으로서 늙은 부모를 모시는 나의 입장에서는 결국 피눈물을 머금고 항복을 택한 것이다. 그래서 부득이 나의 정조를 팔았다." 자신의 친일행적을 솔직히 시인하고 사죄한 사람은 그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그는 6.25 전쟁 때 북한에 납북되었고, 195812월 말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광수, 대학 입학초, ‘무정연재하며 인기 누려

이광수(李光洙, 1892~ 1950)는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조선 왕가의 후손이었으나 지독하게 가난했다. 부모는 이광수가 11세가 되던 해(1902)에 전염병 콜레라로 별세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비상한 두뇌, 스스로의 노력, 그의 재능을 아끼는 주변의 도움으로 어렵게 학업을 이어갔다. 19169월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 입학(최종학력은 중퇴)하였다. 대학 입학 초(191711일부터 614일까지) 그는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을 연재하여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이후 그가 발표한 수많은 문학작품은 한국 현대문학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3.1운동보다 한 달 앞서 일어난 (1919) 동경유학생 2.8독립운동의 선언문을 그가 작성했다.

그 후 상해로 건너가 (19194)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보국장으로 임정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사장과 주필을 겸하며 임시정부의 선전활동을 담당했다. 또한 그는 대한민국의 자주성과 우수한 민족문화를 소개하는 잡지 독립지를 발행하였고(사장 겸 주필) 임시정부 사료 편찬위원회 주임이었다. 그러던 그가 19214월말 단신으로 귀국하였고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를 체포한 식민지 검찰은 곧 무혐의로 석방했다. 시중에는 그가 변절자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우리민족은 허위되고 공상과 공론만 즐겨

일각에서는 이광수가 상하이에 가기 전부터 총독부와 모종의 합의가 있었다고 하였고 일각에서는 이광수와 상해 임시정부를 이간질하려는 총독부의 책략이라는 해석도 있었다. 1923부터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기자로 시작하여 편집국장, 경영진으로 올라갔다. 그는 친일논리를 여러 형태의 글로 발표하였다. “민족개조론”(1922개벽5월호)에서 그는 우리민족은 허위되고 공상과 공론만 즐겨 나태하고 서로 신의와 충성이 없고, 일에 임하여 용기가 없고, 빈궁하므로 삼일운동이 실패로 끝난 이후, 우리 민족이 추구해야 할 방도는 독립투쟁이 아니고 독립을 쟁취하고 유지할 만한 실력을 먼저 기르는 민족개조운동, 자치운동론'이라고 주장했다. “창씨(創氏)와 나”(1940220, 매일신보)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히면서 내선일체를 국가가 조선인에게 허하였다....따라서 차별을 제거하기 위하여서 온갖 노력을 할 것밖에 더 중대하고 긴급한 일이 어디 또 있는가. 성명 3자를 고치는 것도 그 노력 중의 하나라면 아낄 것이 무엇인가라고 하였다.

 

친일변절을 합리화한 나의 고백출간

해방이 된 후 19491월부터 이광수는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194812월에 그는 자신의 친일변절을 합리화하는 나의 고백이란 책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민족의식이 싹트던 때부터 일제 말기까지 자신의 행위를 '민족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서술한 후, 친일 행위 역시 "애국자로서의 명예를 희생하더라도 민족보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다."고 강변했다. 이 책의 부록(친일파의 변)에서 그는 병자호란 당시 끌려갔던 여성들을 홍제원 목욕이라는 지혜를 통해 감싸 안았듯이 친일했던 사람들을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반민특위 법정 진술에서는 "해방이 1년만 늦었어도 조선 사람들은 황국신민의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창씨개명 안한 사람, 신사참배 안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우리 국민은 문맹자도 많고, 경제자립도 어려워 일본과 싸워 이길 힘이 없었다."고 하였다. 최남선, 홍명희와 함께 조선 3대 천재로 불리던 그가 지어낸 논리가 이것이었다. 그는 6.25 전쟁 때 북한에 납북되어 가던 중 195010월 지병인 결핵이 재발하여 사망했다고 한다.

 

([파주에서]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호가 저의 마지막 글입니다. 창간호에서부터 지금까지 되돌아 헤아려보니 9년입니다. 부족하고 재미없는 글을 그래도 읽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파주에서] 편집자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항상 향상하는 신문 만드시기를 믿고 응원하겠습니다.)

 

#1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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