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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146) 오카무라 장군의 경우

입력 : 2023-02-24 06:53:28
수정 : 0000-00-00 00:00:00

이해와 오해 (146)

 

오카무라 장군의 경우

저술가, 번역가 박종일

 

전범 재판을 받고 있는 오카무라 장군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중국에 주둔한 일본군의 최고 지휘관은 중국파견군 총사령관육군대장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 1884~1966)였다.

그는 일본육군사관하교와 육군대학을 나왔고 재학 중에는 우등생이었으며 군인으로서의 경력 대부분을 중국과 관련하여 쌓았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무한, 장사 전투를 지휘했고 다시 화북방면 군사령관이 되어 중국공산당 군대와 싸웠다. 1944년에는 중국파견군 총사령관으로 승진했다. 1945년 일본군이 항복했을 때 중국 내에서는 그가 제1호 전범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국민당 정부는 그에게 어떤 처벌도 내리지 않았고 끝에 가서는 형식적인 재판을 통해 무죄석방해주었다.

오카무라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사적인 온정이었다.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중국유학생반의 구대장을 맡아 유학생의 일상생활을 관리했다. 그 때 유학생 가운데서 허잉친(何應欽, 1945년 국민정부 육군총사령관), 탕은뿌오(湯恩伯. 1946년 국민정부 제1병단 사령관), 옌씨샨(閻錫山. 산서군벌) 등 훗날 국민당 정부의 요인으로 성장한 인물이 여럿 있었다. 오카무라는 중국 유학생들을 멸시하고 홀대했던 다른 일본 교관과는 달리 그들을 평등하고 겸손하게 대했고, 그들이 졸업하고 귀국한 뒤에도 꾸준히 관계를 유지하여 스승과 제자의 정을 쌓았다. 일본이 패전한 후 허잉친과 탕은뿌오 등이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 다녔다.

오카무라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국민당 군대와 공산당 군대가 대립할 때 국민당 군대를 도와준 그의 공로를 장개석이 인정하고 보답했기 때문이다. 2차 대전이 끝나자 국민당 정부는 곧바로 공산당 세력과 내전상태에 들어갔다. 당시 국민당 정부는 중국의 서남과 서북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고 공산당 세력은 화북과 화동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화동과 화북 지역은 일본군이 공산당 세력을 효과적으로 제어해 오던 곳이었다. 국민당 정부는 항복한 일본군의 군사력을 이용해 공산당을 견제하여 내전에서 승리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장개석은 이미 투항한 총사령관오카무라에게 전보를 보내 주둔하고 있는 현지의 질서를 유지하고 국민당 군에게만 투항하라고 지시했다. 오카무라는 평소의 반공신념에다가 자신의 앞날까지 고려하여 장개석의 지시를 완전히 따랐다. 오카무라는 예하 부대에 국민당 정부를지지하고 무기, 탄약, 군수품은 국민당 정부에게만제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장개석은 이러한 오카무라의 태도에 만족하여 그를 면접했을 때 귀관이란 존칭으로 불렀다. 심지어 장개석은 일본군을 포로라 부르지 말고 빈손의 병사라고 부르게 하고 기존의 편제를 유지하도록 허락했다.

장개석과 국민정부 요인들은 공산당 군대를 토벌해온 경험이 많은 오카무라를 군사고급참모로 대우하면서 내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그의 군사적 천재를 빌리기로 결정했다. 국민당 정부는 남경에 그를 위한 특별사무실과 거처를 마련하여 후대하였고 그도 국민정부를 위해 공산당과 싸울 여러 전략전술을 만들어 제공했다. 국민당 군의 고급장교들이 직접 오카무라의 거처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고 심지어 일본육사시절의 애제자탕은뿌오도 직접 찾아가 국공내전에 관한 그의 고견을 들었다.

194582차 대전 종전 후 중국내 일본 전범 제1호가 되었어야 마땅했던 오카무라는 후대를 받다가 19487월에 상해에서 형식상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도주하기 직전인 19491월에 그는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되어 일본으로 돌아갔다. 1950년에는 (대만) 국민당 주석 직속 혁명실천연구원’(장개석 주석 친위대 양성기관)의 고급교관으로 초빙되었다.

역사에는 항상 정의로운 심판만 있는 게 아닌 모양이다. 역사는 항상 진전만 하는 게 아니라 일시적으로 갈 짓자 걸음을 하는 때도 있는 모양이다.

 

 #154호 (2023년 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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