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 [75] 고대제왕의 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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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황제, 짐, 폐하, 전하...고대 제왕의 칭호
군주를 황제라고 부르게 된 것은 진시황(秦始皇) 때부터 시작된 일이다. 그 이전에 중국에서 최고 통치자는 ‘왕(王)’, ‘황(皇)’, ‘제(帝)’란 단칭으로 불렸다(예컨대, 주문왕[周文王], 주무왕[周武王], 삼황[三皇], 오제[五帝] 등). 춘추전국시기에 주 왕실의 세력이 약해지고 제후들이 패권을 다투게 되면서 일부 국력이 강대한 제후국의 군주가 ‘왕’을 자칭하였다(예컨대, 진왕[秦王], 초왕[楚王], 제왕[齊王] 등). 기원전 221년에 진왕(秦王) 영정[贏政]이 육국을 멸하고 황제라고 칭하였다. 영정은 ‘왕’이란 칭호는 천하를 통일한 자신의 공적을 담아낼 수 없다하여 재상 이사(李斯) 등에게 자신을 위한 새로운 호칭을 만들라고 명했다. 이사 등은 연구한 끝에 옛날에는 천황(天皇), 지황(地皇), 태황(泰皇)이란 칭호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태황을 가장 귀하게 쳤으므로 ‘왕’을 ‘태황’으로 고쳐 부르자고 건의했다. 영정은 흡족하지 않아 여러 차례 숙고하다가 “덕은 삼황보다 높고, 공은 오제를 뛰어 넘는다”는 의미로 ‘황’과 ‘제’를 합한 ‘황제’를 칭호로 정했다.
황제가 공적인 장소에서 자신을 지칭할 때는 ‘짐(朕)’이라고 부른다. 진시황 이전에는 ‘짐’이란 단어는 보통의 글자로, 군주의 전용 명사가 아니라 본인을 지칭할 때 누구나 사용할 수 있었다. 그전에 군주가 스스로를 일컫는 전용 명사는 ‘고(孤)’, ‘과인(寡人)’, ‘불곡(不轂)’이었는데 모두가 자신은 ‘덕이 부족한 사람’이란 겸손한 표현이었다. 진시황 때부터 ‘짐’은 황제만 쓸 수 있게 되었고 왕 이하의 귀족은 스스로를 ‘고’라고 불렀다. ‘과인’의 용법은 ‘고’보다 복잡하다. 일반적으로 왕과 제후가 스스로를 부를 때 과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고대에는 사대부도 스스로를 부를 때 과인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었고 제후의 부인이 스스로를 과인이라 부른 경우도 있었다.
황제라도 태상황이 있을 때는 스스로를 ‘여(予)’라고 불렀다.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그냥 ‘나’라는 의미의 ‘아(我)’나 ‘오(吾)’로 불렀다.
‘폐하(陛下)’는 봉건시대에 신하와 백성이 황제를 부르는 경칭이다. ‘폐(陛)’는 원래 궁전의 계단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특정해서는 황제가 앉는 자리 앞의 계단을 가리켰다. 황제는 조회에 나올 때 불의의 사태를 방지하고 최고 권력자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무장한 시종이 ‘폐’의 양쪽에서 늘어서 신하들의 접근을 차단했다. 신하들은 황제에게 직접 말할 수가 없었고 ‘폐’의 ‘아래(下)’에 있는 시종들이 신하의 말을 전달하는 형식을 취했다. 여기서 ‘폐하’라는 말이 나왔다. ‘폐하’라는 단어가 역사기록에 나타난 가장 이른 사례는 사마천이 쓴 《사기: 진시황본기(史记·秦始皇本纪)》인데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폐하가 도적을 죽이고 천하를 평정하였다. 군현을 설치하고 법령을 통일하였다. 예부터 이런 일은 없었으니 그 공적은 삼황과 오제를 능가한다.” 이때부터 세상 사람들이 ‘폐하’를 황제를 직접적으로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하였다. 이 칭호에는 비록 황제를 향해 말하지만 예의상으로는 황제에게 직접 말할 자격이 없음을 잊지 않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전하(殿下)’는 황제에 대한 경칭이었으나 한나라 이후로 황태자, 황제의 형제에 대한 경칭이 되었다. ‘전(殿)’은 궁전을 가리키며 ‘전하’는 ‘폐하’와 마찬가지로 궁전 아래에 늘어선 황제의 시종이란 뜻이다. 。
‘각하(각阁下)’는 직접 대면하기는 어렵지만 가까운 친구나 동년배를 부르는 경칭이다. ‘각(閣)’이란 그런 상대의 집무실을 가리키며 ‘각하’란 그런 상대의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유방(劉邦)이 한(漢)을 창업하고 황제-고조(高祖)-가 되었다. 고조는 매일 아버지 유태공(劉太公)을 찾아가 문안인사를 올렸다. 하루는 유태공이 낡은 적삼을 입고 빗자루를 든 채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엎드려 고조를 맞았다. 고조가 급히 달려가 유태공을 일으켜 세우려하자 유태공은 뒷걸음질 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천자가 되었고 나는 그대의 아버지이기는 하나 평범한 백성이니 어찌 황제에게 예를 갖추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황제에게 예를 갖추는 것은 천하의 법도이다.” 한 신하가 고민에 빠진 고조에게 해법을 올렸다. “예전에 진시황이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를 태상황으로 높인 적이 있습니다.” 고조는 곧바로 유태공을 태상황으로 높이는 의식을 치렀다. 이때 이후로 모든 왕조에서 황제의 아버지를 태상황으로 높이는 방식을 따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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