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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74] 일송정에 푸른 솔은 있었을까?

입력 : 2017-11-01 11: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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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에 푸른 솔은 있었을까?

박종일

 

조국 광복의 의지를 장렬하게 노래한 선구자는 운동권 집회에서 단골로 불리며 심지어 행사장이나 술자리에서도 널리 불리는, 세대와 계층을 뛰어넘어 온 국민이 사랑하는 국민가곡이다. 눈보라 휘날리는 만주 벌판에서 말을 달리는 독립군의 모습을 그린 가사의 내용과 비장미 넘치는 멜로디는 노래 부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이 노래를 작곡한 조두남(1912~1984)은 생전에 출간한 수상집 그리움에서 이 노래를 작사한 윤해영(1909~ ?)을 만나게 된 경위를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고생으로 시달린 풍상의 흔적과 병색이 완연했지만 예리하고 번뜩이는 그의 눈엔 뭔가 새로운 저항과 저력이 보였다. 윤혜영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구깃구깃한 종이 한 장을 내 앞에 내놓았다. ‘용정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일송정 푸른 솔은이란 구절로 시작되는 시가 적혀 있었다. 조국 광복을 기다리는 노래를 꼭 지어달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난 그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조두남은 꼭 집어 말하지는 않았으나 작사자 윤해영은 독립군이었든 것처럼 묘사하였다. 그는 이렇게 선구자를 작곡하여 발표하였는데 1932년의 일이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196312월 서울 시민회관에서 바리톤 김학근이 이 노래를 불러 유명해졌고, 그 뒤로 이 노래는 기독교방송국에서 방송한 정든 우리 가곡이란 프로그램의 시그널 뮤직으로 7년 동안 사용됨으로써 전 국민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987816일 광복절 특집으로 KBS라디오는 독립운동가 김동삼 일대기를 방송했는데 그가 가곡 선구자의 실제 모델이라고 소개했다. 작곡자의 주장에 의하면 1932년에 이 곡을 발표했을 때 용정사람들이 즐겨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1940년대 초반에) 조두남과 4년 여 동안 만주에서 악단 활동을 같이 했다는 김종화란 연변 거주 조선족 동포가 선구자의 신화를 깨뜨리는 증언을 (1995년에) 내놓았다. 그의 증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용정의 노래와 지금 우리가 즐겨 부르는 가곡 선구자의 멜로디는 동일하다. ‘용정의 노래1944년 봄에 (흑룡강성) 녕안(엣 이름은 녕고탑)에서 가진 조두남의 신작 발표 공연에서 처음 소개 되었다. 가사의 내용은 만주 땅에서 유랑하며 힘들게 살아가는 나라 없는 조선백성의 신세를 한탄하는 애수의 노래였다. 원래의 가사에는 선구자란 단어는 전혀 없었다. “활을 쏘던 선구자라거나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란 가사가 있던 자리에는 원래 눈물 젖은 보따리라거나 흘러온 신세같은 구절이 있었다. 일본이 지배하던 1930년대 만주의 공개된 극장 공연에서 조국을 찾겠노라 말 달리는따위의 가사가 들어 있는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작사가 윤혜영은 용정의 노래이전에도 발해고지’, ‘혜란강’, ‘오랑캐꽃’, ‘낙토만주등의 친일 시를 발표한 시인이다. 그는 해방 후 북한으로 돌아가 학교 교사로 지내다가 1950년에 중반에 죽었다. 조두남도 만주에서 활동하던 시절에 용정의 노래말고도 목단강의 노래’, ‘’, ‘아리랑 만주’(윤혜영 작사) 등의 노래를 작곡하고 발표했는데 모두 일본의 만주 개발정책을 찬양하는 노래이다.

위의 증언이 나오기 전에, 그리고 남쪽의 한국인이 연변을 출입할 수 있게 되기 전에 조두남은 죽었다. 냉전 구도 속에서 해방 후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된 데다가 중국과의 내왕도 끊어 졌으니 식민지 시기에 만주에서 살다가 남쪽으로 귀환한 사람들의 이전 행적은 본인의 주장 말고는 검증하기가 쉽지 않았다. 조두남은 마산에 정착하여 음악 교육자로서 여러 가곡을 발표하였다. 그는 사후에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추서 받았다.

한국과 중국 사이에 국교가 열린 후 많은 한국인이 연변지역을 독립운동의 성지로 생각하고 찾아갔다. 한국인 관광객들은 일송정을 찾아와 목청 높여 선구자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일송정에 선구자노래비가 세워졌다. ‘선구자의 진실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자 2000년 대 초에 연변자치주 정부는 노래비의 가사를 지워버리고 돌만 남겨 놓았다.

김종화의 증언을 믿지 않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최소한 어떤 논란이 있는지는 알고서 이 노래를 부르자.

(이 글은 류연산 저,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2004, 경기도 고양, 도서출판 아이필드], pp.16~24, 204~218의 내용을 기초로 하여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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