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 (145) 라스푸틴
수정 : 2023-01-29 00:47:27
이해와 오해 (145)
라스푸틴
번역가/자유기고가 박종일
그리고리 라스푸틴(1869~1916)은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시대에 활동했던 신비주의자였으며 종교적 성자로 추앙받았고 당시의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는 많은 추문을 일으킨 데다가 황제에 대한 영향력이 너무 컸던 탓에 보수적인 귀족그룹에 의해 살해되었다.
라스푸틴은 시베리아의 농촌마을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87년 결혼한 후 7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성년이 될 때까지 성장한 자녀는 셋뿐이었다. 그는 1897년에 러시아 내의 성지를 순례한 후 종교적 변신을 경험한다. 교회 내에서 정식 지위를 갖지는 않았지만 그는 순례자란 칭호로 불렸다.
그는 30여세가 되던 때부터 예언과 병자치료를 생업으로 삼았다. 어느 지역의 가뭄을 예언하고 황실 종친의 개를 치료하여 명성을 얻었다. 1903년 겨울에 수도 페트로그라드로 간 그는 그곳의 교회와 사회지도층 사이에서 많은 추종자를 만든다. 이런 연줄을 통해 1905년 라스푸틴은 황제와 황후를 만나게 된다. 일부 종친과 황제의 총신들이 천거하여 1906년 말부터 그는 혈우병을 앓고 있는 황태자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라스푸틴은 최면술에 능했고 최면술은 황태자의 병을 안정시키는데 효과가 있었다.
라스푸틴은 황제와 황후의 신임을 얻으면서 귀족 부녀자들의 숭배를 받았다. 그는 문란한 생활에 빠져들었고 심지어 관리의 임명에도 간여하였다. 많은 관리들이 그의 눈 밖에 나서 자리를 잃었다. 그는 궁정 내부에서 논란이 많은 인물이었다. 어떤 사람은 그를 종교적 몽상가, 선지자로 보았고 어떤 사람은 협잡꾼으로 보았다. 라스푸틴의 권력이 정점에 오른 때는 황제가 1차 대전을 수행하고 있는 군대를 독려하기 위해 전선에 나가있었을 때였다. 이때 황후와 라스푸틴의 영향력이 증가하였다. 러시아군은 전투에서 계속 패배하고 있었다.
라스푸틴은 청년시절에 전국을 유랑할 때 볼가 강 지역의 독일인들이 부유하게 사는 모양을 목격했다. 그는 1914년에 러시아가 독일과 개전하는 것을 적극 반대했다. 그런데 그는 독일 출신인 황후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탓에 1차 대전이 폭발하면서 궁중의 보수적인 정치가들과 대중들로부터 독일의 간첩으로 지목되었다. 황후와 라스푸틴은 대중의 비난을 받았다. 1916년 10월 30일 이른 아침, 라스푸틴은 살해되었다. 역사학자들은 라스푸틴에 대한 나쁜 평판이 차르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지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는 살해되는 과정에서 독약을 먹고도 죽지 않았고 총을 맞고 숨이 끊어졌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등 여러 가지 신화 같은 소문이 돌았지만 확인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소문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그의 성기가 엄청나게 크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라스푸틴의 시체가 발견 된 후 그의 성기는 잘려서 방부처리 되고 박물관에서 전시하였(는데 길이가 28.5cm이었)다.
어떤 작가는 라스푸틴 살해에 영국의 정보기관이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영국은 러시아가 독일과 강화를 맺으면 독일이 서부전선으로 전력을 집중하게 되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그를 제거했다고 한다.
어쨌든 라스푸틴은 살해되었고, 러시아제국은 역사에서 지워졌고, 니콜라이 2세 황제의 가족도 사라졌다. (그런데 한 세기도 더 지나 오늘의 한국에서 라스푸틴 활동상의 모사본이 돌아다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1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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