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장현 박사의 통일 문화 산책 ㉑ 어떻게 통일할 것인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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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통일할 것인가 (2)
현실성있는 통일 방법론을 모색하기 위해 이번 호와 다음 호에서는 지금까지 제기됐던 주요 방법론을 검토해보자.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론과 전쟁 발발
이승만 정부는 1948년 8월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한 후 북진통일을 추진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무력에 의한 북진통일을 공공연히 주장하였으며, 6·25전쟁을 치른 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 시기 남한의 국력은 북한에 비해 열세였다. 경제력에 있어서 북한은 1955~60년 기간 동안 경제성장률이 연평균 13.2% 를 기록해 남한의 연평균 3.8%를 압도했으며, 군사력에 있어서도 주한미군의 전력을 제외한다면 남한에 비해 뒤지지 않았다. 더욱이 당시의 국제환경은 미· 소 간 냉전이 극심했기 때문에 무력에 의한 통일시도는 전쟁으로 연결될 경우 국제전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이었다.
한편 남한에 이어 북한도 1948년 9월 38선 이북 지역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한 후 정통성이 자기들한테 있다고 주장하며‘민주기지론"을 주창했다. 북한 지역을 먼저 민주기지로 만든 후 이후 남쪽으로 넓히겠다는 전략이다. 결국 상대방을 부정하는 논리였던 남북의‘북진통일론"과‘민주기지론"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으며,‘민주기지론"이 선수를 침으로써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론은 북한에 비해 경제력이나 군사력에서 열세에 있는 처지에서 현실성을 갖는 방안이 아니었다. 이승만 정부가 명분 일변도의 북진통일론을 집권기간 내내 줄기차게 내세웠던 것은 다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통일의 명분을 국내정치적 용도로 악용하였다. 북한과의 전쟁상황임을 내세워 국민적 동원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정치적 반대세력을 제압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국내정치적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론은 4· 19 의거 후 허정 과도정부 수반에 의해 허장성세의 통일론으로 규정돼 폐기되었다.
박정희 정부의 ‘선건설 후통일론"과‘적대적 상호의존과 공생"의 분단체제
군사쿠데타로 장면 정부를 무너뜨리고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집권 18년 기간 내내 ‘선건설 후통일론"을 유지했다. 현실적으로 힘의 열세를 인정해 통일은 뒤로 늦추고 경제건설에 주력하겠다는 방안이다. 사실‘선건설후통일론"은 통일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므로 통일론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남북간 힘의 균형이 팽팽하고 통일의 구심력이 미약한 당시 상황에서 현실적인 정책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에 주력한 결과 1962년 이후 연평균 7.9%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으며, 한국경제는 수출위주의 외향적 공업화 전략이 60년대 이후 UN이 설정한‘개발의 10년대", 70년대의 중동건설붐과 오일달러 환류, 80년대 중반의 3저 현상 등 유리한 대외환경과 맞물려 고도성장을 거듭하였다.
이 시기 북한의 통일론은 연방제 통일방안이었다. 연방제란 남북 두 정부는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최고민족위원회를 조직해 경제문화발전을 위한 상호 협력을 해나가다 이후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을 하자는 것이다. 김일성은 1960년 8월에 처음 이를 제안한 후 1980년10월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이란 이름으로 체계화시켰다. 그러나 북한은 공식적인 언명과 달리 실제로는 군비증강과 함께 ‘선혁명후통일"의 공세적이고 패권적인 전략을 추진하였다. 대남전략에 있어서도 ‘남조선혁명론"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지하당인 통혁당 창립 등을 지원해 남한 내 봉기를 선동하는 전략이다.
박정희 정부의 반공제일주의와 대결 위주의 대북정책은 북한의 군사적 모험주의와 맞물리면서 1· 21 청와대 습격사건,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이 발발하면서 무력충돌의 위험까지 이르는 등 남북간 긴장을 극도로 고조시켰다. 그 와중에서 남북의 집권자들은 상대방과의 적대관계를 내부의 정권유지와 정적탄압에 악용하였다. 이 시기 준전시상태의 지속은 남북 양측의 집권자들에게는 내부의 정치적 경쟁자를 제압하고 국민적 불만을 무마하는 데 있어서 호재가 아닐 수 없었다. 박정희 정부 시기 한국 정부의 ‘선건설후통일론"의 수세적 정책과 북한의 연방제 등 공세적 통일정책은 ‘적대적 상호의존과 공생"이라는 묘한 분단체제를 만들어냈다.(다음 호에 계속)
정치학 박사·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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