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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로 가는 한 걸음(4)  한국전쟁과 설마리 전투

입력 : 2020-06-16 09:33:29
수정 : 2020-07-03 01:47:17

통일로 가는 한 걸음(4)  한국전쟁과 설마리 전투

 

 

* 한국전쟁, 70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전쟁이 시작된 1950625,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고 거기에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다는 20년을 더해 7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지만 우리에게 아직도 한국전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70년의 세월이 지나가도록 종전을 선언하지 못하고 정전협정이라는 어정쩡한 상태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일시적으로 잠시 전쟁이 중단된 분단국가가 바로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7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한국전쟁에 대한 원인과 해석도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 땅 국민들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는 한국전쟁은 ‘6.25 사변’, 혹은 ‘1950625일 새벽,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북괴군의 기습 남침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전쟁이 북한군의 남침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다툼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1945년 해방 이후 남북이 38선을 경계로 갈라지면서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5년여 동안 38선 인근에서는 남한의 국군과 북한의 인민군 사이에서 크고 작은 총격전이 수도 없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 특히 19506, 전쟁이 일어나기 얼마 전까지 북한 지역에서는 대규모 군대의 무장과 훈련이 있어왔고, 전방을 감시하는 첩보부대에서도 이러한 낌새를 상부에 보고했으나 우리 국군 수뇌부는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전쟁이 발발하기 3일 전인 623일 전 군에 휴가명령을 내리면서 전 군의 3/1이 휴가를 나가는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게다가 각 군 주요 지휘관의 대규모 인사이동, 전후방 부대의 대대적이 교체 등이 모두 그해 6월에 일어난 일이다. 이러한 상황들이 반복되면서 급기야 일부에서는 북한군의 남침 유도설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인류 역사에는 언제나 수많은 전쟁이 있어왔다. 이들 전쟁의 공통점이라면 전쟁을 결정하는 것은 소수의 권력자들이지만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전쟁의 결정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힘없는 백성이라는 점이다. 한국전쟁 역시 이러한 역사적 모순을 비껴가지 않았다.

* 유엔군과 중공군의 참전

 

1950625일 새벽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은 북한군은 포천과 의정부를 지나 미아리 고개를 넘어 3일 후 서울로 진입했다.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며 큰소리치던 국군 수뇌부는 자취를 찾을 수 없었고, 국민들에게 동요하지 말고 서울에 있으라고 녹음방송까지 한 이승만은 이미 대전으로 도망간 다음이었다. 단숨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차근차근 수원을 지나 남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던 시기에 915일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928일 서울을 다시 수복하였다.

한국전쟁 참전 유엔군 하면 우리는 흔히 16개국(미국, 영국,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필리핀, 터키, 에디오피아, 태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벨기에, 프랑스, 네덜란드, 그리스, 룩셈부르크, 콜롬비아)을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 국가 이외에도 5개국(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인도, 이탈리아)이 비 전투분야인 의료지원을 담당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유엔군의 지원으로 승기를 잡은 연합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하면서 승리를 눈앞에 두는 듯 했으나 195010월 팽덕회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30만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전세는 다시 역전하여 19511.4후퇴로 서울을 내주고 이후 전세는 양측의 지루한 공방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설마리 전투에 참여했던 글로스터 대대원들의 당시 생활 모습

 

   

* 칠중성, 설마리 전투

 

한국전쟁 당시 파견된 유엔군(16개국 194만여 명) 가운데 영국은 미국 다음 두 번째로 많은 56천여 명이 참전했다. 1951422일부터 25일까지 중공군은 서울을 함락시키기 위해 3개 사단을 앞세워 파주 적성의 칠중성과 설마리 235고지에서 대공세를 벌였다.

영국군 29여단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특히 29여단의 글로스터 대대 병사들은 남하하는 중공군을 저지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칠중성부터 방어 전략을 폈으나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설마리 계곡까지 후퇴하였고, 설마리 235고지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중공군의 공세를 끝까지 막아내려 하였다.

대대원 652명중 전사 59, 포로 526명의 피해를 입었으며 생존자는 67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전투는 적성, 설마리, 동두천으로 돌파하려는 중공군의 작전과 계획을 3일간이나 저지함으로서 다른 아군부대들이 안전하게 철수하여 서울을 방어할 수 있게 시간을 벌어주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하였다.

칠중성은 해발 147m의 중성산 정상부와 그 남서쪽에 위치한 해발 142m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축조한 테뫼식 산성(마치 띠를 두르듯 산 정상부를 빙 둘러 가며 쌓아 올린 산성)이다. 해발고도가 낮은 편이지만, 서쪽과 북쪽 임진강변에 이르기까지 주변 지역에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정상부에서 주변 지역 조망이 뛰어나다. 한국전쟁 당시 칠중성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고지전이 벌어진 것도 이러한 지형적 이점 때문이었다.

칠중성과 설마리 전투에서 영국 글로스터셔 대대가 몇 십 배에 달하는 중공군의 남하를 지연시키는 동안 한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 위한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었다. 만일 이곳에서 영국군이 중공군을 저지시키지 못하고 바로 서울로 진격할 시간을 주었다면 한국전쟁의 양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설마리 전투 추모공원에 조성된 글로스터 대대원 조형물

 

 

* 참전용사의 장학금

 

해마다 4월 말(설마리 전투시기인 22-25)이면 국가보훈처와 주한영국대사관이 함께 전쟁 당시 전사한 영국군의 넋을 기리는 추모식인 설마리 전투 기념식이 열린다. 1999년에는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이 직접 방문하고 추모비에 헌화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파주시는 2014년 영국의 용감한 젊은 영웅들의 희생과 헌신을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글로스터 대대 베레모를 상징물로 만들어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공원을 조성했다. 추모공원이 조성된 후 당시 포로로 잡혔다가 영국으로 돌아간 참전용사들은 현재도 이곳을 방문하고 있지만 고령과 사망으로 점점 참여자가 줄어 안타깝기도 하다.

 

 

 

▲ 기념 조형물에 글로스터 대대원의 활동과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국가보훈처와 각국 대사관을 통해 한국을 방문하는 참전용사들은 한국의 눈부신 발전상을 바라보고는 자신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낀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설마리 전투에 참전했던 한 영국군은 19살의 나이로 글로스터 대대에 배속돼 이듬해 설마리 전투에 나섰다가 포로가 돼 종전 후에야 영국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몇 개월이면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이 길어져 귀향까지 3년이나 걸렸다고 회고했다.

"부산에 도착한 게 19509월 경이었습니다. 몇 달 후 크리스마스까지는 집에 돌아갈 수 있을 줄로만 믿었는데 돌이켜보면 순진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호기심 반, 도전 정신 반으로 전쟁에 자원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참혹한 전쟁의 체험은 평생 잊히지 않는 상흔이 되어 남아있다.

부대원 750명 대부분이 죽거나 포로가 된 설마리 전투가 지금도 생생하다는 그는 계속되는 전투로 수랭식 기관총을 식힐 물마저 떨어져 나오지 않는 소변을 모아서 사용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포로가 된 그는 압록강변 중공군 포로수용소까지 6주간 이동하는 고난의 행군을 겪어야 했다.

글로스터 대대 출신 참전용사들은 넉넉지 않은 형편인데도 매달 받는 연금을 일부 쪼개 한국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참전용사로서 한국의 미래를 책임질 청소년 교육에 적은 힘이나마 도움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것이 그들의 장학금 지급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정부는 얼마 전 한국전쟁 당시 참전한 국제연합(유엔) 참전용사들에게 코로나 방지용 마스크를 지원했다. 국무총리실 소속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는 지난 5월부터 한국전쟁 유엔참전용사 마스크 지원사업을 추진해 왔다. 이는 한국전쟁 당시 참전용사가 보여준 희생과 공헌에 보답하려는 취지이며 참전용사도 우리 국민이라는 정부의 뜻과 의지이기도 하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세계 각지의 머나먼 나라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우리 땅에 왔다. 한국이 어디에 붙어있는지, 어떤 역사를 가진 민족인지 알지도 못한 채 왔을 것이다. 나라에서 가라고 하니까, 더러는 호기심과 모험심에서, 더러는 공산주의와 싸우며 자유를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왔을 수도 있다.

그렇게 각자의 이유와 사연을 가지고 온 젊은이들은 낯선 타국 땅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을 겪으며 목숨을 잃거나, 부상으로 불구가 되거나, 포로가 되었다가 그들의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아직도 전쟁의 상혼에 고통당하면서도 한국을 그리워하고 발전상에 놀라기도 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일부는 한반도의 통일을 염원하고 일부는 연금을 쪼개 자기가 희생한 그 나라의 학생들에게 다시 장학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우리는 이들을 기억해야 한다. 이념과 사상, 국적을 떠나 인류 보편의 가치를 추구하고자 먼 이국땅에 와서 자신의 청춘을 희생했던 이들 아름다운 노병을 우리는 6월 한 달만이라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설마리전투 기념식에서 파주지역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는 참전용사

#116호

 

이철민 /참회와 속죄의 성당 민족화해분과정/ 도서출판 바이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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