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 [83] 원세개(袁世凱)의 조선인 첩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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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개(袁世凱)의 조선인 첩들(1)
1912년 중국에서 신해(辛亥)혁명이 일어났을 때 원세개(1859—1916)는 이홍장이 육성한 신식군대 북양군(北洋軍)의 영수였다. 혁명군은 청 제국을 무너뜨릴 만큼 강력하고 통일된 무력을 갖추지 못했다. 한편 청 황실이 의존하는 가장 강력한 무력은 북양군이었으나 혁명을 진압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하지는 못했다. 평생을 권모술수와 배신을 거듭하며 정치적으로 성장해 온 원세개는 혁명군과 황실 사이에서 균형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는 황실에게는 무혈 명예 퇴진을 보장해줄 터이니 민국의 등장을 인정하라고 설득했고, 혁명군 측에는 평화롭게 황실을 퇴진시킬 터이니 민국의 총통자리를 달라고 요구했다. 이리하여 민국의 총통이 된 그는 혁명의 대의 같은 것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온갖 술수를 동원했다. 마침내 그는 새로운 제국의 성립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로 등극했다(‘중화제국’, 1915년 12월). 거국적인 반대에 부닥친 그는 겨우 몇 달 동안만 황제노릇을 하다가 다음해 6월에 울화병으로 죽었다.
원세개가 중국 근대정치사에서 우스꽝스럽지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정치인으로 성장하게 된 기반은 조선이었다.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 대원군이 재등장했다. 난을 진압할 능력이 없었던 조선 왕실은 청의 개입을 요청했다. 이홍장은 북양군을 파견하여 난을 진압하고 대원군을 유인하여 천진으로 납치해갔다. 이때 원세개는 북양군 오장경(吳長慶) 부대의 하급 참모로서 조선에 왔고 나이가 23살이었다. 그는 청군 진영을 방문한 대원군의 경호병력을 무력화시키는 행동대장 역할을 했다. 이때 두각을 나타낸 그는 승진을 거듭하면서 1894년 귀국하기 전까지 무려 12년 동안을 조선에 주둔한 청국 군대의 최고사령관으로서 조선의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이른 바 개화당이 일본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킨 갑신정변은 그의 지휘아래 청국 군대가 무력으로 개입함으로써 3일 천하로 끝났다. 원세개는 청을 조선의 ‘종주국’으로 대내외에 각인시켰고 사실상 ‘태상황’ 노릇을 하면서 개화기 조선의 운명을 결정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조선 조정은 그의 위세에 눌려 지냈다. 심지어 그는 조선 왕(고종)의 폐위까지도 계획했다고 한다. 조선에서 청의 지위를 확고히 한 솜씨와 공로를 이홍장으로부터 인정받아 원세개는 중국 국내정치 무대에서 중요인물로 빠르게 성장해갔다.
민국시기를 다룬 중국의 텔레비전 사극이나 역사소설에는 원세개가 새로운 제국을 만들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가 온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불과 몇 달 만에 화병으로 죽고 마는 희극적 사건이 빠지지 않고 화제로 등장한다. 그런데 원세개의 경력에서 흥미를 자극하는 또 하나의 화제는 그의 결혼생활이다. 원세개에게는 정실부인 이외에 9명의 첩이 있었고, 그 첩들 가운데서 3명은 원세개가 서울에 주재하는 동안에 맞아들인 조선 여성이다. 조선인 첩들의 성은 각기 오(吳)씨(어떤 책에서는 이李씨라고 한다), 김(金)씨, 민(閔)씨이다. 그 중에서 김씨는 조선 왕비의 4촌 자매이며 결혼할 당시 나이는 16살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세 조선 여인에 관해 언급한 한국 쪽의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그들은 누구였을까?
글 박종일(지혜의 숲 권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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