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140) 안중근의 후손 박종일
수정 : 2022-07-26 04:38:23
이해와 오해(140)
안중근의 후손
박종일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안 의사는 1910년 3월 26일에 여순감옥에서 순국한다. 안 의사는 의거 직전 국내에 남은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 '집을 마련해두었으니 연해주로 오라'고 전한다. 당시 그에게는 어머니 조마리아, 부인 김아려, 딸 현생(1902년생), 아들 분도(1905년생), 준생(1907년생) 등이 있었다. 부인과 두 아들은 연해주를 향해 떠났고 어머니와 딸은 국내에 남았다. 부인은 하얼빈에 도착했을 때 남편이 이토를 쏴 죽였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일제에 붙잡혀 갇히는 신세가 된다. 곡절 끝에 풀려났지만 이때부터 일제의 감시와 위협은 늘 따라다녔다. 국내에 남은 어머니와 딸도 마찬가지였다. 안 의사의 두 동생(정근, 공근)과 그 가족, 안 의사의 어머니와 딸 등은 일제의 눈을 피해 연해주로 탈출한다.
안 의사의 장남 분도는 아버지가 여순감옥에서 순국한 이듬해에 길거리에서 낯선 사람(일제의 사주를 받은 밀정으로 추정된다)이 주는 과자를 받아먹고 죽는다. 그때 분도의 나이는 일곱 살이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고,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안 의사 일가는 안창호와 김구의 도움으로 러시아를 떠나 상해로 이주하게 된다(1919년 10월).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 공원에서 청년 윤봉길의 의거가 일어난다. 임시정부는 급히 상해를 떠나 피난길에 나선다. 상해에 남은 안 의사 가족은 보호막도 후원자도 없는 고립상태에 빠졌고 안 의사 일가에 대한 일제의 위협과 회유가 본격화된다.
안 의사 의거 후 정확히 30년을 버틴 차남 준생은 일제의 압박에 굴복한다. 준생은 1939년 10월 15일에 박문사(이토 히로부미 추모 사찰. 현재의 서울 장충단 공원에 있었다)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이토 분키치)을 만나 "아버지를 대신해 깊이 사죄"한다고 고개를 숙였다. 일본의 치밀한 각본대로 연출된 화해극이었다. 매일신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친일신문은 ‘그 아버지들을 이 아들들이 잇다’, ‘조선통치의 위대한 전환사’, ‘부처의 은혜로 맺은 내선일체’라는 제목을 달아 이 사건을 크게 보도했다. 김구는 준생을 ‘아비는 호랑이인데 자식은 개’라고 매도했고 해방 후 중국 정부에 (상해에 남아있던) 준생을 ‘죽여달라’고 요청한다. 준생은 살해되지는 않았지만 귀국을 망설이다가 1946년 몰래 귀국한다. 귀국 후 남한에 숨어살다가 한국전쟁 중 1951년 부산으로 피난해 있을 때 덴마크 병원선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덴마크는 한국전쟁에 병원선을 파견하여 남한을 도왔다). 그는 혜화동 천주교 공원묘지(포천)에 묻혔고 그의 아내와 1남 2녀는 미국으로 이민했다. 준생의 아들 안웅호는 미국에서 심장병의 권위 있는 의사가 되었다(그는 한국어가 서툴렀다). 웅호의 아들 토니 안(Tony Ahn)은 안 의사 의거 104주년 기념식 참석차 한국을 방문하였다(그는 한국어를 할 줄 몰랐다).
안 의사의 딸 현생은 연해주에서 상해로 온 후 천주교재단에서 운영하던 숭덕여학원(대학)에서 불문학을 공부했다. 1920년대에 황일청(신흥무관학교 1기 졸업생)과 결혼하여 딸 둘을 두었다. 1939년 박문사 화해극을 만들어낸 일제는 다음 목표로 안중근의 장녀 현생과 사위 황일청을 공략했다. 1941년엔 현생과 황일청도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만주조선시찰단’이라는 이름의 행렬에 끼어 박문사를 찾아 분향하였다. 1945년 12월, 강소성 서주에서 귀국편을 기다리고 있던 황일청은 광복군 출신 인사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서주의 '조선인 교민회장'으로서 일제의 녹을 먹었기 때문이다. 1946년 5월 귀국한 현생은 서울에서 전구 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대구로 피난했다. 그곳에서 현생은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전신) 불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전쟁이 끝나 서울로 돌아온 현생은 1959년 고혈압으로 쓰러졌고 1960년 4월 사망했다.
현생과 황일청 사이에서 장녀로 상해에서 태어난 황은주(1928~2021년)는 음대를 나와 군인 남편을 만나 슬하에 네 명의 자식을 뒀고, 1970년대에 일가족이 미국으로 이민했다. 황은주는 2015년 영구 귀국한 후 안 의사 기념사업에 관여하다가 2021년에 타계했다.
안 의사의 동생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그들 가운데서는 친일이나 변절이란 비난을 받는 본인이나 후손이 나오지 않았다. 안 의사 직계 가족들의 인생역정을 살펴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역사를 제대로 살아내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인가....
#143호
신문협동조합「파주에서」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