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 [80] 기원전 164년, 두부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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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80]
기원전 164년, 두부 탄생
2007년 9월, 중국요리협회는 안휘(安徽)성 회남(淮南)시에 ‘중국두부의 고향’이란 칭호를 부여했다. 회남은 오랜 역사를 가진 문화도시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했던 옛 회남국은 한(漢)나라의 제후국으로서 기원전 203년에 설치되었다가 81년 동안 존속했다. 두부의 발명자가 바로 이 회남국의 마지막 제후왕 유안(劉安)이다.
두부는 중국의 가장 오래된 식품 가운데 하나이다. 명(明)나라의 유명한 의학자이자 약물학자인 이시진(李時珍)(1518-1593년)이 저술한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한나라 회남왕 유안이 두부를 처음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기원전 164년, 회남왕 유안은 장생불노의 약을 얻기 위해 도사 수천 명을 불러 모았다. 그들 중에서 공력이 가장 뛰어난 8명이 회남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이들을 ‘팔공(八公)’이라 불렀다. 이들은 늘 초산(楚山)에 모여 신선의 도를 논하고 단약(丹藥)을 만드는 실험을 했다. 어느 날 콩 즙으로 단약을 만드는 실험을 하던 중에 콩 즙이 석고와 만나자 엉기면서 부드럽고 매끄러운 고체로 변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유안은 단약을 만드는 데는 실패했으나 부산물로 두부를 발명하게 되었다. 두부 만드는 법은 그 후로 민간에 퍼져나갔고 지금도 민간에서는 유안을 ‘두부의 시조’, ‘두부신선’이라 부른다. 초산의 이름도 ‘팔공산’으로 바뀌었다. 전설에 따르면 유안과 팔공은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고 그들이 먹다 남긴 단약을 주워 먹은 닭과 개들도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한 사람이 득도하면 그 집안의 닭과 개도 승천한다(一人得道,鷄犬昇天)” 고사성어는 여기서 나왔다.
고대 중국에서는 두부를 ‘숙유(菽乳)’, ‘여기(黎祁)’, ‘소재양(小宰羊)’ 등으로 불렀고 두부란 이름이 정착한 것은 당(唐)나라 이후의 일이다. 당 천보(天寶) 10년(서기 757)에 승려 감진(鑑眞. 일본 불교 남산율종南山律宗의 시조, 이름난 의학자)이 일본으로 건너가 두부 만드는 기법을 일본에 알려주었다. 그래서 일본의 두부제조업자들은 그를 두부의 시조로 모신다. 두부는 송(宋)나라 때에 고려에 전해졌고 19세기 초에는 유럽, 북미, 아프리카에도 전해져 지금은 전 세계인이 즐기는 음식이 되었다.
팔공산 아래 기우촌(祁圩村)은 ‘중국 두부의 발상지’란 이름을 갖고 있다. 5백여 호가 모여 사는 이 마을에서 400여 호는 대대로 두부를 만들고 있다.
광동성 사강하촌(社崗下村)이란 곳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13일에 두부축제가 열린다. 2011년에 열린 축제에서 무게 6톤, 길이 3.49미터X너비 3.45미터X높이 0.38미터의 두부가 나와 기네스북에 세계 최대의 두부로 기록이 올랐다. 2011년 11월, 타이완 타이베이시의 한 축구장에서 무게 1,026 킬로그램의 대형 두부를 1,339명이 동시에 나누어 먹는 행사가 벌어졌다. 이 역시 가장 많은 인원이 동시에 두부를 먹은 세계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우리나라에서는 두부 제품의 종류나 두부를 이용하여 만든 요리의 종류가 비교적 단출하지만 두부의 본고장 중국에서는 그 종류가 너무 많아 여기에 소개하기도 어렵다. 우리의 고향 ‘파주 장단콩축제’는 성공적인 향토축제로 꼽히는데, 한 단계 수준을 높이기 위해 중국의 각지에서 열리는 두부축제를 벤치마킹해보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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