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장역사교실 2부 (32) 2000년에 걸친 칠중성 전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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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역사교실 2부 32
2000년에 걸친 칠중성 전투사
문화재 명칭: 파주 칠중성(사적 제437호)
제목: 삼국의 군사요충지, 칠중성
정헌호(역사교육 전문가)
주월리 마을에서 다시 빠져나와 굴다리 밑을 지나서 구읍리의 적성향교가 있는 곳까지 달려간다. 적성향교를 지나 산길을 따라 오르면 중성산 정상에 오를 수 있다. 굽이쳐 흐르는 임진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북쪽으로 육계토성지는 물론 임진강 건너 연천의 호로고루성도 잘 보인다. 뒤쪽으로는 높은 감악산이 버티고 있다. 군사전문가가 아니라도 이곳에 진지를 쌓아야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 이미 성을 쌓아 군사기지로 활용했으니 이름하여 칠중성이다. 약 2000년에 걸쳐 전개된 이곳의 전투사를 살펴보자.
백제가 칠중하에서 말갈을 궤멸시키다
온조가 한수 이남으로 도읍을 옮긴 지 5년이 흐른 온조왕 18년(기원전 1년)의 일이다. 유목적 기질을 가진 말갈이 습격해 왔다. 겨울이라서 식량이 부족했을 터이다. 온조왕은 단호히 대처한다.
“짐이 친히 말갈에 본때를 보여주고자 한다. 군대를 소집하라.”
온조왕은 추운 겨울이었으나 병사를 거느리고 칠중하(임진강)로 나아가 말갈과 맞섰다. 온조는 말갈의 추장 ‘소모’를 사로잡아 마한(이때 마한은 백제보다 더 큰 나라)으로 보내고, 나머지 적병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버렸다. 온조가 말갈의 군사를 궤멸시킨 곳이 칠중하이므로, 지금의 칠중성 어디쯤으로 추정된다.
고구려가 칠중성을 쌓다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의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로 자처하며 서로 경쟁하였다. 백제의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였다.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은 할아버지(고국원왕)의 원한을 복수하기 위해 백제의 석현성 등 10성을 빼앗았다. 심지어 백제의 관미성(탄현의 오두산 추정)마저 20일 만에 함락한 뒤 백제 아신왕을 무릎 꿇게 했다(391년, 「파주에서」 45호 참조). 이때 고구려가 함락한 백제의 성이 58개였는데, 칠중하 지역도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는 칠중하 유역을 점령한 뒤 이곳에 성을 쌓고 ‘칠중성’이라고 이름하였다. 칠중성은 실제 고구려말로 ‘난은별’이다. 모두 ‘일곱 겹’이라는 뜻이다. 아마 임진강이 여러 번 굽이치기 때문에 붙인 것 같다.
신라가 칠중성을 빼앗다
고구려는 약 150년 동안 칠중성을 백제 및 신라의 공격을 막아내는 성으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백제의 성왕과 신라의 진흥왕이 연합하여 공격해 오자 한강 유역을 상실하였다(551년). 그 후 신라의 진흥왕은 백제 성왕을 배신하여 한강 유역을 독점하였고, 함경도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때에 칠중성도 신라의 영토에 편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이후 신라가 선덕 여왕 때 칠중성에서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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