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바이스와 싸드, 그 평화의 변곡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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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바이스와 싸드, 그 평화의 변곡점
올해가 한중수교 25주년 되는 해이다. 92년 북방외교의 일환으로 중국과 수교한 이후 한중간의 교역액은 2016년 기준 2.113억 달러로 미국, 일본을 합한 것보다 많다. 이중 수출이 1,244억 달러, 수입이 870억 달러, 우리나라의 대중 무역 흑자는 869억 달러로 대중 무역을 통해 일본에 당한 무역 적자를 고스란히 만회하고도 남으니 우리나라 외환보유고의 일등 공신이 바로 대중 무역임을 알 수있다.
경축해 마지 않을 한중수교 25주년은 그러나 매우 을씨년스럽게 지나가고 있다. 한중간의 직접적인 마찰이 아니라 한밤중의 홍두께비 처럼 슬그머니 다가온 싸드라는 괴물 때문이다.
이런 시기에 예술의전당은 한중수교 25주년을 기리기 위해 중국의 대표적인 문인화의 거장 치바이스 전시회를 기획(2017.7.31~2017.10,08), 동양화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치바이스(齊白石 :1864-1957)
호남성 샹탄 사람으로 본명은 순지(純芝)이고 호가 바이스(白石)이다. 중국 공산당의 영도자인 마오쩌둥(毛澤東)과 동향으로 30년 먼저 태어났다.
집안이 빈한하여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서당에서 1년 배운 게 마자막이니 정규교육이라는 건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다. 몸이 약한 게 그를 예술가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서당을 그만 둔 9살 무렵부터 농사일을 거들게 된 치바이스는 타고난 약골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는게 없자, 집안 어른 들은 산에 올라 가 소를 먹이고 여물을 베어오게 하였다. 산에서 소가 풀을 뜯어 먹는 걸 지켜보는 틈틈이 서당에서 배운 한자들을 복습하고 새로운 글자들을 익혀 나가면서 혹시라도 모르는 글자가 있으면 집에 가는 길에 외할아버지 댁에 들려 물어 보곤 하였다.
몇 년이 지나고 부모님은 치바이스를 농사일 대신 목공일을 시키기로 하고 근처에 사는 대목공(우리 식으로는 목수)에게 보냈으나 목재 운반은 커녕 장도리 하나도 못드는 치바이스는 그날로 대목공을 그만두고 보다 힘이 덜 더는 소목공(목공예) 문하로 들어가게 된다.
훗날 이 선택은 신의 한수가 된다. 목공에는 생각 보다 손목 힘이 많이 필요하고 오랜 시간의 목공예 장비(끌, 대패) 연마는 치바이스가 전각(도장), 서예에 일가를 이루는 기본이 된다. 목공예 기본이 없는 전문가들에 비해 그의 손목은 파워가 넘쳐 나고 끌과 붓을 자유자재로 운용, 일도법(도장이건 서예건 단 한번의 손놀림으로 완성하는 그의 기법)을 창안하는데 큰 힘이 된다.
소목공으로 생활비를 버는 틈틈이 동네 아주머니들의 주문으로 그림도 그리는 한편 글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던 치바이스는 호남성 일대의 화가, 서예가들과 교류하면서 시작에도 관심을 두게 된다. 그의 그림 소재는 대체로 자가가 자라면서 늘 보아왔던 논게, 붕어, 개구리, 참외, 풀벌레 등 우리에게 친숙한 사물이었다. 사실주의 동양화의 비조인 셈이다. 치비이스는 사실에서 소재를 찾되 사실을 추구하지 않는 기법을 창안하였다 한다. 사실 넘어 본질을 간파하여 간결한 필체로 그려나가는 그의 작품은 유쾌, 경쾌, 통쾌하기까지 한다. 유머로 포장한 진실이랄까? 그의 작품의 울림은 하여 세대를 넘어 국경을 넘어 진동하는 듯. 피카소는 치바이스 파리 전시회를 보고 “중국에 이런 화가가 있는데, 그림을 배우러 피리로 오는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단다.
마흔 남짓까지 고향 호남성을 떠나지 않았던 치바이스도 그간 사귄 친구가 산시성 시안(西安. 당나라 시대의 장안)의 고관으로 부임, 초대장을 보내자 처음으로 천리 여행길에 올라 두루 산천을 유람하고 이는 다시 그의 작품 세계에 많은 여행을 끼치게 된다. 이후 4번에 걸쳐 베이징, 상하이,남쪽의 광저우, 스촨 등을 유람하게 된다.
심지어 광저우에서는 쑨원(孫文) 혁명당군의 비밀문서 운반을 맡기도 하였다. 1910년대 광동성 광저우는 국민혁명의 본거지 였다. 이러한 행적은 훗날 중국 공산당과의 교감에 큰 밑거름이 된다.
베이징에 정착한 치바이스는 베이징 예술학원의 쉬바이청 교수의 요청으로 이 대학 미술교수직을 수락하기도 한다. 정규 교육을 일체 받지 않은 치바이스를 교수로 초빙한 것도 또한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도 무척 좋았다 한다.
훗날 치바이스는 자기 작품 세계를 평화로 규정하였다. 인간이 자연과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염원하는 평화주의자. 그의 전시회가 열리는 2017년 한중간에는 수교 25주년을 기리는 축하의 분위기 보다는 싸드 배치를 둘러 싼 갈등이 더욱 증폭되고 있는 실정이다.
평화를 설파했던 치바이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살려 “싸드 가고 평화 오라”는 성주 주민들의 소망을 되새겨 본다.
글 손학붕 전 전시기획 파나코 대표
손학붕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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