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139) 두 전쟁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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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전쟁지도자
▲이승만과 스탈린
박종일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했다. 승자와 패자를 통 털어 2차 대전에서 가장 많은 인명손실을 감당한 국가는 소련이었다. 최소한 2,500만 명이 죽었고 그 중에서 1,700만은 민간인이었다. 스탈린이 전쟁수행을 위해 자원을 동원한 방식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테러였다. 개전 첫 주 독일군이 무서운 기세로 공격해올 때 소련군이 막대한 인명손실을 내고도 모스크바로 가는 길목을 지키는 민스크가 함락되자 서부전선 최고사령관 파블로프 장군과 3명의 부하 장군들이 반역죄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처형되었다. 최고사령관의 처형은 확실한 효과를 냈다. 비밀경찰 부대가 최전선 바로 뒤에 배치되어 탈주자를 쏘았다. 병사들은 독일군과 싸우는 것보다 비밀경찰 부대를 만나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포로가 되었다가 구출된 자는 투옥되었고 처형되는 경우도 흔했다. 스탈린이 초토화작전 명령을 내린 후 가옥과 농장과 마을이 파괴되자 민간인은 집을 잃고 영양실조와 굶주림으로 고통 받았다. ‘내부의 적’으로 지목된 사람들은 처형되거나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테러가 소련 민중이 그처럼 끈질기게 싸운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스탈린은 대중의 지지를 유도하고 전투준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선전사업도 병행했다. 민족정서에 호소하며 애국투쟁을 강조하는 선전사업이 시행되었다. 스탈린은 연설에서 ‘형제자매 여러분’, ‘동지 여러분’, ‘시민 여러분’ 같은 전통적인 애국적 낱말을 동원해 ‘비겁자, 탈주자, 공포를 조장하는 자’에게 무자비하게 복수하자고 호소했다. 교회가 다시 문을 열었고, 성직자들이 수용소로부터 돌아왔으며, 병사들은 신의 축복을 받으며 전장으로 보내졌다.
1941년 10월 중순 모스크바가 독일군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 분명해 보였고 시민들이 공황상태에 빠져 있던 결정적인 순간에 정권을 안정시킨 스탈린의 중대한 결정에 시민들은 환호했다. 안전문제 때문에 스탈린이 수도를 떠나 우랄산맥 너머로 옮겨갈 모든 준비가 끝났다. 모스크바 역에는 그를 태운 열차가 수증기를 내뿜으며 출발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떠나지 않기로 결정했다. 스탈린이 모스크바에 남아 국민들 맨 앞에 서서 전쟁을 지휘하기로 결심했다는 뉴스가 순식간에 퍼져나가고 시민들의 사기는 빠르게 회복되었다. 결국 소련은 2차 대전의 승전국이 되었고 그 덕분에 전후에는 초강대국이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쪽을 공격했다. 27일 오후 1시에는 국방부는 의정부 전투에서 승리했고, 전황이 좋아져 수원 천도 결정이 취소되었으며, 정부는 여전히 서울에 있으니 안심하라는 방송이 반복되었다. 오후 4시에는 “맥아더사령부가 서울에 전투사령부를 설치키로 했고, 내일부터 미군이 참전하게 될 것이므로 현 전선을 고수하게 된다”는 특별방송이 있었다. 이날 밤 10시 이승만 대통령이 육성방송을 통해 “맥아더 장군이...수많은 유능한 장교들과 군수물자를 보냈는데 곧 도착할 것이다. 이 좋은 소식을 국민에게 전하고자한다”고 말했다. 국민들은 안심했다. 그런데 이 방송은 녹음된 것이었고, 대통령은 27일 새벽 3시 특별열차편으로 서울역을 떠났고, 이때를 전후해 정부요인 국회의원 각 기관장들과 그 가족이 피란길에 올랐지만 국민에게는 극비였다. 대통령이 탄 열차는 대구까지 달려갔다. ‘너무 멀리 온 것 아니냐’는 측근의 진언이 있었고 대통령은 열차를 돌려 대전으로 갔다. 그곳에서 방송연설을 녹음했다. 그렇게 되짚어 온 대전에서 29일 맥아더 방한을 마중하러 수원비행장에 갔다 와서 또 대전을 떠났다(한강방어전이 한창이던 7월 1일에 떠났고 대전이 북한군에게 함락된 때는 7월 20일이었다), 승용차 편으로 목포를 향해 달리다가 이리(지금의 익산)에서 자동차가 고장 났다. 8시간을 기다려 기차로 갈아타고 목포에 이르렀다. 목포에서 해군 소해정에 올라 19시간 항해 끝에 부산에 닿았다. 일주일가량 부산에 머물다 또 대구로 올라갔다(7월 9일). 경무대를 떠나 돌고 돌아 다시 대구에 도착한 열흘 남짓 동안, 이 나라에는 대통령이 없었던 셈이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서울을 탈환되자 이승만은 서울로 돌아왔다. 시중의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을 보고 국회의원들이 이승만더러 서울 시민들한테 사과하라고 권유하자 이승만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사과할 생각 없으니 하고 싶으면 당신들이나 해라.” 이승만 정부는 부역자 색출을 한다며 서울시민 무려 55만 명을 체포하고 그 중 800명을 사형시켰다.
#1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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