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의 아름다운 얼굴(146) 그림책 작가 고정순 "철학의 빈 자리에 그림책이 있기를"
수정 : 2025-03-26 05:27:38
파주의 아름다운 얼굴(146) 그림책 작가 고정순
"철학의 빈 자리에 그림책이 있기를"
‘파주1도시1책읽기운동본부’는 2025년의 책으로 고정순 작가의 [옥춘당]을 선정했다. 이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돌아가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삶을 떠올리며 그린 작품이다.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어 정말 감사합니다. 격려의 의미도 있겠지만 말 그대로의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한 도시가 한 책에 집중해줬다는 의미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게 우리 동네라는 사실이 주는 따뜻한 느낌이 있어서 특히 더 감사했습니다.” 작가의 말이다.
“사랑도 생로병사가 있는 것 같아요”
이 작품은 붉은 꽃이 가득한 배경에 한 쌍의 남녀가 손을 잡고 눈을 맞추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옆에 쓰인 첫 문장. “고자동 씨와 김순임 씨는 전쟁고아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름, 그리고 전쟁고아라는 시대가 만든 꼬리표로 시작한 이야기는 어느새 두 사람의 사랑과 인생, 그리움과 상실감으로 끝난다. 전쟁이 만든 텅 빈 자리를 인간의 삶으로 채운 작품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소재 중 하나는 아마 저희 할아버지의 인품일 거예요. 요즘 열린 공동체라는 말을 많이 하지요. 저희 할아버지는 그런 단어조차 모르셨던 분이지만 그걸 몸소 실천하셨죠. 제가 봤던 진짜 어른의 모습이라 생각해요. 진짜 어른은 단 한 명에게라도 기억하고 싶은 유년을 남겨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또한 이 작품은 존재와 죽음 앞에 독자를 세워놓고 어떻게 살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시간 앞에 무력한 인간을 그리는 동시에 그 속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추구하는 인물을 다룬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저희 할머니가 맞은 첫 번째 변화가 말씀을 안 하시는 거였어요. 사랑이 정말 위대한 한편 무섭기도 하다고 느꼈죠.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만큼 그걸 잃고 난 후에 사람이 넋을 잃는 느낌도 받았거든요. 사람처럼 사랑도 생로병사가 있는 거 같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할머니가 온전히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데 집중했던, 할머니에게는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겠구나, 라는 생각도 들어요.”
365개의 파주 하늘
고정순 작가는 파주에서 매일 다른 하늘을 본다. 그만큼 섬세한 눈으로 파주의 속도와 풍경을 흠뻑 느끼는 사람이다. 그가 파주에 마음을 뺏긴 건 파주에 사는 지인 집에 왔던 3년 전. 동네가 예뻐 여행하는 기분으로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서울살이 정리를 결심했다고 한다. 법흥리 탄현작은도서관에서 그림책 작가 고정순을 만났다.
“처음엔 헤이리 예술인 마을이 눈에 들어왔어요. 근데 제가 크고 웅장한 아름다움보다는 법흥리 쪽 약산로, 그 곳의 정미소나 논밭, 아니면 철새 도래지 같은 풍경을 더 좋아하거든요. 또 제가 사는 동네의 인구도 굉장히 적어서 꼬마 친구들의 뒷통수만 봐도 누구네 집 아이인지 왠지 알 거 같은 그런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서울에 살다왔으니 불편한 점도 있었다. 서울에선 5분 간격으로 다니던 마을버스의 배차간격이 깜짝 놀랄 정도로 길었던 것. 집에서 시내까지 1시간 이상 걸리는 게 익숙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좋다고 한다. 동네 분들이 가끔 차도 태워주시는데 속도와 효율이 사라진 자리에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느낌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모든 건 기다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왜 이렇게 마을버스 배차간격이 이렇게 긴 거야,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더 느긋해졌어요. 서울 살 때는 아침에 일어나서 해야할 것들이 쌓여 있었고 또 그걸 어떻게든 해냈었는데 이젠 그게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그렇게 계획하지도 않아요. 스케줄러를 쓰지 않는 게 가장 큰 차이인 거 같아요.”
열 배 정도 느려진 삶
고정순 작가는 서른아홉 살에 첫 그림책을 내기까지, 각종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역꾸역 이어가며 그림책을 독학했다. 그는 가난이 어떻게 질병을 부풀리는지, 생존하느라 바쁜 사람이 어떻게 아픈 사람이 되어가는지에 관해 자신의 산문집에 썼다. 그만큼 처절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바라보는 파주는 한껏 느려진 세상, 그리고 그 사이로 보이는 주변 풍경과 사람이 가득한 곳이다.
“파주하면 제일 좋은 게 하늘, 노을 이런 것들이예요. 참회와 속죄의 성당이 보통 성당과 느낌이 달라서 좋아하는데요. 그 뒷편으로 보면 하늘이 쫙 펼쳐져 있어요. 예전에는 하루하루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연을 거의 보지 못하고 살았는데 여기서 열 배 정도 느린 삶을 사니까 뭔가를 자세히 볼 수 있는 시간이 생겼어요. 3년 동안 지내면서 한 번도 같은 하늘을 못 본 것 같아요. 내가 이런 자연을 좋아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원화 작품 도슨트를 하는 작가모습
그림책 [100만 번 산 고양이]가 바꾼 운명
고정순 작가는 그림책을 운명처럼 만났다. 처음엔 회화 공부를 해서 외국에서 살고 싶었고 친구와 난방이 안되는 싼 월세 작업실을 구했다. 어느 날 친하게 지내던 위층 언니 집에서 밥을 먹다가 등에 부딪혀서 만난 것이 바로 그림책이었다. [100만 번 산 고양이]와 [지각 대장 존]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
“고양이가 반복해서 태어나고 사는데 사랑을 정말 많이 받아도 도무지 행복해하질 않아요. 왕의 고양이, 뱃사공의 고양이, 소녀의 고양이 등등 백만 명의 사람들이 고양이를 사랑했지만 고양이는 자기가 선택한 삶이 아니란 이유로 윤회를 거듭해요. 전 내가 진정 나의 욕망을 욕망하고 있는 건지, 내가 선택한 삶을 살고 있는 건지 충격을 받았어요. 그 그림책에 충격을 받았고, 그림책의 독자로 머무는 걸로는 성에 차지 않았어요. 이렇게 저를 잠 못 자게 하는 매력적인 걸 직접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죠.”
그 날 작가는 인생 전체를 다시 계획했다. 외국 유학도 회화도 포기하고 한국에 남아 그림책 작가가 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까지 14년이 걸렸다. 그는 길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자기만의 방식으로 꿈을 이뤘다.
▲굼벵 책방에서 강연하는 모습
초방책방에서 키운 꿈
초방책방은 고 신경숙 작가가 운영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책방이다. 신촌에 있는 이 책방에서 고정순 작가는 매니저로 일을 하며 그림책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작가들이 책을 내거나 하면 출간 기념회를 해요. 그럼 제가 혼자서 음식도 하고 커피도 내리고 했죠. 부러웠어요. 친구들은 등단하기 시작하는데 저는 그걸 바라보는 입장이었으니까요. 그렇게 고단하게 행사 치르고 나면 화장실을 청소하면서 제 나이를 셈하곤 했어요.”
고정순 작가는 자신이 그림책 작가를 준비하며 가장 많은 빚을 진 공간을 도서관이라고 이야기한다. 가난한 작가가 문화예술의 자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 곳이 도서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초방책방도 그에게 도서관의 연장선이었다.
“그 서점에서 일한 8년이 육체적으로 가장 덜 힘들었고 정신적으로는 가장 풍요로웠던 시간이었어요. 초방책방은 그림책을 전문적으로 판매하고, 신경숙 선생님이 소유했던 외서들 같은 게 굉장히 많았기 때문에 그림책을 정말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었죠.”
그는 그 곳에서 그림책을 공부하면서 매일 한 피아니스트의 음악만 들었다. “글렌 굴드 피아니스트의 모든 연주를 들었고 이젠 같은 곡이라도 언제 연주하고 녹음한 앨범인지 맞출 수 있어요” 이 이야기가 담긴 책이 [나의 괴짜 친구에게] 이다.
▲ 고정순 작가의 그림책 들
더미, 16장의 가능성
‘더미’란 그림책처럼 가로로 반 접은 A4용지를 말한다. 그림책을 만들기 위해 구상한 내용을 16장에 간략하게 스케치한 것을 말한다.
“책방에 있을 때 그림 그릴 수 있는 도구가 마땅히 없었어요. 그래서 책방에 항상 굴러다니던 이면지를 다 모았죠. 그 이면지를 반으로 접어요. 만약에 한 소녀가 물을 길러 가기 위해 반나절 동안 우물가로 간다는 이야기가 있으면 그 과정을 빠르게 16장으로 만들어요. 기록하지 않으면 생각이 날아가버리죠. 16장인 이유는 그걸 넘어야만 그림책이 될 수 있어서예요. 16장 이 안되면 그림책 한 권이 되기 힘들어요. 그래서 예비 작가들한테도 16장짜리를 만들어오라고 숙제로 내고 만약 16장까지 가지 못하면 그건 그림책이 되기 힘든 내용이니 과감히 버리라고 해요. 넘는 건 괜찮지만 부족하면 이야기가 안 되거든요.”
노동하는 예술가
14년 동안 갖은 아르바이트로 버티며 고정순 작가는 드디어 39살에 첫 그림책을 냈다. 그는 첫 책을 냈을 때를 회상하며 그 때의 기분을 지금 마감 중인 산문집의 주제와 연결지었다. 한 작가가 견뎌낸 긴 터널을 엿볼 수 있었다.
“첫 책을 냈을 때 출판사에서 책을 보내준다고 했어요. 근데 그걸 못 기다려서 출판사로 직접 달려갔죠. 어떤 모습으로 달려갔는 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첫 책을 받아들었을 때 내 이름이 앞에 있었죠. 첫 이야기의 주인공도 저희 할아버지였습니다. 할아버지에게 저 그림책 한 권만 만들게 해주세요 그랬는데 어느덧 30권 정도의 책을 만들게 됐네요.”
그는 지금 네 번째 산문집을 마감 중이다. 그동안 자신이 했던 부업과 아르바이트에 관한 책으로 긴 준비기간 동안 생긴 자신만의 이야기를 노동이란 관점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그리고 자신이 통과한 세월을 노동하는 예술가로서의 시간으로 정의했다. 첫 그림책을 내기까지 그리고 그 후로도 끊임없이 일을 해야만 했던 시간을 책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만만한 독서클럽 종방 기념 사진
철학 교육의 빈자리에 그림책이...
그림책과 동화책은 다르다. 동화를 한자 뜻풀이하면 ‘아이(의) 이야기’이다. 명확한 독자층을 가진 장르인 것이다. 반면 그림책은 그림이 있으면 그림책이다. 독자층 또한 일반적으로 0세부터 100세까지로 폭 넓다.
“그림책이라고 하면 애들이 보는 건가, 만화책인가, 라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외국에는 픽처북이라고 단독 장르로 분류되어 있고 칠드런북, 즉 아이들이 보는 아동문학과는 달라요. 읽기에 연령제한이 없기 때문에 성인들이 프로포즈 할 때 그림책으로 하는 문화도 있어요.”
고작가는 우리나라의 많은 문제들이 철학이 부재하기 때문에 생겼다고 여긴다. 철학의 빈자리, 철학 교육의 빈자리에 그림책이 놓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성인들이 뒤늦게 그림책을 읽는다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인생에 관한 질문들과 마주할 거예요. 그림책은 교조적이거나, 가르치거나, 훈수를 두지 않아요. 어렵게 구성돼있지 않은 게 장점이죠. 한 발 더 나아간다면, 저는 그림책이 노인회관, 복지회관, 요양원 같은 곳에 놓였으면 좋겠습니다. 문화적인 자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 그런 그늘진 곳에 있었으면 해요.”
연천 언니들 발표회때 펑펑 울어
고정순 작가는 작년 여름 3개월 동안 연천군에서 할머니들과 그림책 만드는 수업을 했다. 각자 8장짜리 그림책을 만들어 전시하고, 전시 후엔 한 권의 그림책으로 만들었다. 수업은 논밭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있는 센터에서 진행됐는데, 동네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들러서 커피를 마시거나 농사일 하다가 잠시 쉬어가기도 하는 곳이다.
“운영하시는 선생님께 센터를 왜 만들었는지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어머니께서 그 동네에 사시는데 저녁이 되면 온동네 불이 다 꺼져있대요. 딱 하나 켜진 게 TV였다는 거예요. 노인들의 삶인 거죠. 빛이 있고 소리가 있는 TV를 그저 틀어놓는 것. 그 삶이 안타까워서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할머니들은 전쟁통에 학교 못 가고 무덤앞에 칠판 놓고 수업했던 이야기, 공기놀이를 너무 좋아해 ‘공깃돌을 시집갈 때 장롱에 넣어가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이야기, 애를 너 많이 업어서 정작 자신의 아이는 업고 싶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읽고 쓸 줄 모르는 분들이 많아 녹취하고 대신 이야기를 써드렸다. 할머니들은 평생 자기 이야기를 할 기회를 억압당한 여성 노인이었고, 이런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이 그림책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처음엔 제가 그 분들에게 뭔가를 가르쳐준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00 수업이 끝나고 발표회 잔치를 할 때 내가 더 많이 배웠다는 걸 깨달았어요. 앞으로 나의 노년은 그냥 혼자 지내는 게 아니라 연대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소망도 갖게 됐고요. 풍악을 울리고 트로트도 나오고 하는데 제가 엄청 많이 울었거든요. 할머니들을 연천언니라고 부르는데, 언니들이 도리어 저를 위로해주시더라고요.”
‘모두의 일상은 소중하다’는 예술
고정순 작가는 일상에서 소재를 많이 얻는 편이다. 스스로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인라고 하지만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일상과 상상의 절묘한 조합을 생각하면 겸손의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문화예술이라고 하면 우리나라는 돈 많은 사람들이 팔자 좋을 때 남는 시간에 하는 유희처럼 통용되지만 제가 꿈 꾸는 건 일상의 예술이거든요. 포털의 뉴스나 오늘의 날씨부터, 접경지역에서 바라보는 새들의 경계 없이 나는 모습이나 청소년 노동자들의 죽음까지... 이렇게 일상에서 소재를 찾으려고 해요.”
그가 말하는 일상은 가볍지 않다. 죽음, 폭력, 노동, 동물권 등 그가 다루는 주제가 보다 근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 철학적 고민을 어떤 이야기로 어떻게 들려줄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왔고, 그 고민의 결과가 일상의 예술이었다.
“권정생 선생님이 광주에 사는 5. 18 희생 유족 조천호 어린이에게 남긴 편지가 있어요. 그 편지를 그림책으로 만든 게 [봄꿈 : 광주의 조천호 군에게]입니다. 제가 전달하고 싶었던 건 5. 18이라는 거대 담론이 아니었어요. 조천호 군이 봄이 오면 아버지가 좋아하는 꽃을 찾으러 가고싶은데 왜 할 수 없게 된 거지? 라는 질문 앞에 독자를 세워두고 싶었거든요. 그건 당신들의 일상도 이렇게 될 수 있다, 내 일상이 소중한 걸 알아야 다른 사람의 일상도 소중하다는 걸 알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예요.”
그가 바라보는 일상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건 일상 속에서 쉽게 지나쳐버리는 약자들이었다. 그런 낮은 곳의 이야기, 그래서 더 깊은 이야기에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는 고정순 작가. 지금까지 그 자리에서 전쟁고아였던 노부부, 홀로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 난독증을 가진 어린이, 실험체 동물, 말하지 못하는 무생물 등 다양한 주인공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췄다.
그는 그림책 작가가 아니었다면 어떤 일을 했을 것 같냐는 질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답했다. 고정순 작가의 그림책 주인공들이 언제나 소외된 누군가라면, 그가 꿈 꾸고 기다리는 건 더이상 그의 그림책이 필요하지 않은 세상일지도 모른다. 그때 고정순 작가는 어떤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줄까.
최홍익 기자
#1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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