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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에 찾아온 티베트 난민지원 NGO ‘록빠’ 이야기

입력 : 2015-12-18 10:33:00
수정 : 0000-00-00 00:00:00

파주에 찾아온 티베트 난민지원 NGO ‘록빠’ 이야기



 







▲12월 10일 교하도서관에서 세계인권의 날을 맞이하여 록빠(티베트 난민지원 단체) 초청, 영화상영 및 강연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인연은 신비롭고 모든 것은 연결되어있다.



 



12월10일 세계인권의 날을 맞아 교하도서관은 티벳난민을 지원하는 비정부기구 록빠라는 NGO단체 대표 텐진 잠양 씨와 한국인 빼마(남현주), 록빠 어린이도서관장 오은영 씨를 초대했다. 이날은 달라이라마가 노벨평화상을 받은 날이자 록빠가 세워진지 10년 째 되는 날이기도 했다. 인도 다람살라에서 파주까지 먼 길을 온 텐진 잠양과 부인 남현주씨를 만나 티베트와 록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히말라야를 넘는 티베트 난민들



“내가 티베트 난민이라고 말하면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나는 티베트에 두 번, 세 번 다녀왔다고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몹시 부러워요. 우리는 티베트인이지만 티베트에 갈 수 없으니까요”



 



1950년 중국은 티베트를 침공해 인구 1/6을 학살하고 3,700개의 사원을 파괴했다. 티베트의 정치종교지도자 달라이라마가 20만명의 티베트인과 함께 인도로 망명했다. 현재 티베트는 중국의 지배하에 티베트의 말과 글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며 정책적으로 유입된 한족으로 관광수익과 상권을 한족이 장악하고 있다. 티베트인들은 가능하면 자식들을 인도로 탈출시키기 위해 애쓴다. 그나마 티베트의 문화를 배울 수 있고 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해외 망명의 기회가 있는 인도가 현지보다 더 낫다고 믿기 때문이다. 공안의 총을 피해 밤에 움직이고 낮에 자며 영하 20도 이하의 추위 속에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와 싸우며 해발 4천 이상의 설산을 넘어 인도 땅에 도착해도 그들의 기다리는 미래는 불투명하다. 너무 일찍 부모와 떨어진 아이들은 마음 이 허전해 쉽게 마약과 술에 손을 댄다. 가족이 없는 이들은 외로운 마음에 일찍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또 빨리 쉽게 헤어진다. 다람살라에는 한 부모 가족의 아이들이 많다. 거의 모든 재산을 처분해 브로커에게 건넨 후 희망을 안고 다람살라에 넘어온 어른들도 곤경에 처하기는 마찬가지, 인도에서는 티벳처럼 유목이나 농경생활을 통해 자급자족할 수 없어서 값싼 육체노동자로 전락한다.



 



한국여자와 티베트 난민2세의 만남



수녀가 되고 싶었던 빼마(남현주)는 인도에 여행을 갔다가 티베트 난민 2세인 잠양을 만났다. 잠양은 다섯 형제 중 유일하게 학교에 갔다. 중학생인 어느 날 교장선생이 불렀다. 외국인 스폰서와 연락이 끊겼다며 더 이상 학교에 오지 말라고 했다. 잠양은 부모에게 말하지 않았고 오래 방황했다. 그때 마음 한 켠에 이런 생각이 찾아왔다. 마치 무엇이 될지 모르는 씨앗처럼.



 



‘왜 나는 외국인의 도움 없이는 학교에 다닐 수 없나? 티베트인이 스스로 자립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잠양은 빼마와 결혼을 한 뒤 인도 다람살라에 무료 공부방과 탁아소를 열었다.



 





▲햇빛을 쬐는 록빠 탁아소 아이들.



 



하필, 왜 탁아소였을까? “지금 당장 다람살라에 필요한게 무엇인지 둘러보았어요. 시장에서 아기를 등에 업고 장사하는 엄마들이 보였어요. 돈을 벌어야 먹고 사는데 아이들을 맡아줄 데가 없는 이들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었어요”



 



선생이 되거나 장사를 하거나 승려가 되는 이외의 다른 꿈을 꿀 수 없는 티베트 난민 2,3세들은 취직이 어렵고 임금이 적어 부부가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방세와 생활비를 감당하지 못해 아이 양육에 몰입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빼마와 잠양은 직접 티베트 엄마들을 찾아다니며 아이를 봐주겠다고 했고 이것이 록빠의 첫 시작이었다.



 





▲록빠 무료 탁아소 아이들의 생일잔치.



 



잠양과 빼마의 600km 국토종단



인도에 여행을 갔다가 이들의 활동을 눈여겨 본 도보여행가 김남희씨가 후원음악회를 열어 록빠 후원의 첫 기반을 마련했다. 이런 움직임에 힘을 얻은 잠양과 빼마는 티베트 난민의 상황을 한국에 알리기 위해 600km의 국토 종단에 나섰다. 빼마는 매일 그들의 이야기를 인터넷에 올렸고 이 이야기는 알음알음 인도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 사이에 퍼졌다. 국토 종단을 마친 후에 이들에겐 많은 친구들이 생겼고 이들의 도움으로 홍대 앞에서 티베트 페스티발을 개최했다. 행사에서 마련된 후원금 300만원을 들고 다람살라로 돌아온 둘은 록빠라는 이름의 무료 탁아소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것이 10년 전 록빠의 탄생이야기다.



 





▲한국 연극인이 아이들과 함께 연 그림자 연극놀이 수업.



 



탁아소 록빠에서 문어발 확장, 록빠 가게



록빠는 그 뒤 10년 동안 엄청 커졌다. 2008년 티베트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났고 많은 이들이 분신자살을 했으며 중국은 무력진압을 했다. 다람살라 또한 시위와 파업으로 가게와 식당이 문을 닫자 노점을 하고 건설 잡부로 일하던 네 명의 여성들이 록빠를 찾아왔다. 빼마는 이 여성들이 기술을 갖고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찾아주고 싶었다. 재봉사인 티베트인을 데려다 이 여성들에게 기본적인 재봉과 자수 기술을 가르쳤다. 이것을 시작으로 여성작업장이 생겼다. “여성작업장이 시작된지 6개월이 지났을 때 작업장 여성들에게 자기가 만든 물건이 어떻게 팔리고 어떤 반응을 받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록빠의 자원활동가 중 한 사람이 영국으로 돌아가 후원파티를 열어 70만원인가를 가져왔어요. 그것으로 가게를 빌렸고 자원활동가들과 가게를 꾸몄죠.” 사직동에 있는 ‘사직동 그가게’도 마찬가지 페인트칠이며 의자와 탁자 하나하나 모두 한국인 자원봉사자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가게다. 이렇게 수공예품을 팔 수 있는 록빠 가게(Rogpa shop & cafe)가 인도와 한국에 한 개 씩 생기고 십시일반으로 책을 모아 도서관을 만들고 티베트어린이들을 위한 티베트 문화와 동물이 담긴 그림책도 펴냈다. 한국의 한 로스터리 바리스타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돈을 모아 로스팅 기계를 사서 록빠에 찾아갔다. 그렇게 다람살라의 유일한 로스터링 카페 록빠 커피숍이 생겼다.



 





▲록빠 어린이 도서관.



 



빼마와 잠양이 10년 동안 해 온 것들을 보면 신기하다. 록빠 주변에는 항상 재능있고 선량한 사람들로 넘쳐난다. 사직동 그 가게, 짜이집만 해도 12명의 자원봉사자들로 빈틈없이 몇 년 째 잘 굴러가고 있지 않은가, 그 가게에 놓을 샐러드를 위해 사람들은 스스로 작목반을 조직해 텃밭농사를 하고 음악회를 열고 바자회를 한다. 이 모두 빼마와 잠양이 시킨 일이 아니라 자원봉사자 저희들이 좋아서 벌인 일들이다. 이름난 NGO단체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얽히고 설킨 인연들이 만들어내는 가지가지 워크숍과 재마난 작당들, 생기와 재미가 그 안에는 늘 넘친다.



 



세상에 피는 다양한 꽃



빼마에게 물었다. 왜 하필, 티베트? 한국에도 불쌍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차고 넘치는데...편안하고 넉넉하고 때때로 가차없이 자원봉사자들을 쥐어짜며 밥도 주지않는 빼마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한 가지 꽃만 피어있으면 재미없잖아요. 패랭이꽃, 장미꽃, 개망초, 온갖 꽃이 있어야 아름답지. 내가 하는 일이 나는 티베트 문화라는 한 가지 꽃을 지켜 내는 것이라 생각해요. 내가 한 말은 아니고 잠양이 한 말이에요” 거창하게 뭘 한다는 생각없이 늘 재밌는 만큼 그러나 쉼없이 부지런히 일해 온 빼마는 티베트 난민인 잠양에게 모든 공을 돌렸다.



 





▲지역주민과 함께한 록빠 페스티벌.



 



 



글 정연희 시민기자



사진 남현주 제공





 


#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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