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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춘 마을, 파주 장파리와 연풍리

입력 : 2017-09-30 00:15:00
수정 : 0000-00-00 00:00:00

시간이 멈춘 마을, 파주 장파리와 연풍리

파주시민참여연대, 미군부대가 있던 장파리연풍리 역사 탐방 진행해






 

마치 시간이 멈춘 듯 1960, 70년대 풍경이 남아 있는 마을이 있다. 1960년대의 모습을 간직한 천주교 공회’, 조용필이 음악 활동을 시작했던 미군 클럽 라스트 찬스’, 미군이 세운 재건중학교’, 그 외 요즘은 볼 수 없는 연탄집, 쌀집, 나무 전봇대, 흙집……. 파주시 장파리와 연풍리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장파리와 연풍리는 미군부대를 중심으로 발전한 시가지였다. 전쟁으로 초토화되고 먹을 것조차 구하기 힘들었던 시절, 미군부대 주변에는 먹을 것뿐만 아니라 돈이 넘쳐났고 일자리도 있었다. 미군부대 안에서는 PX판매원, 보초, 부대 내 각종 노무자들이 일을 했다. 그리고 미군부대 주변에는 세탁소, 옷가게, 신발가게, 사무소, 클럽, 극장을 비롯한 여러 가게와 편의시설이 들어섰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장사를 하거나 일자리를 얻기 위해 몰려들었다. 때로 살기 위해 미군부대에서 물건을 빼돌리거나 훔치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미군부대 주변에는 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기지촌(외국군 기지 주변에 형성된 촌락)이 형성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부대 주변은 우리나라에서 현대화가 가장 빠르게 진행되는 곳이었다. 한국 정부 또한 기지촌에 경제적행정적 혜택을 주었다. 특히나 수많은 미군부대가 곳곳에 주둔했던 파주는 상권이 활성화되고 외지인이 들어와 인구가 증가하며 유동인구가 넘치는 등 급격한 사회 변화를 겪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장파리와 연풍리는 동네 개도 달러를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돈이 넘쳐났고, 한때 땅값이 서울 명동과 비교될 정도였다.

그러나 대단한 호황을 누리던 기지촌은 미군부대가 철수한 1970년대부터 빠르게 성장했던 것처럼 빠르게 쇠락했다. 마을에 자체적인 발전 동력이 없이 미군부대를 상대로 한 서비스업만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파주의 장파리와 연풍리가 시간이 멈춘 듯한 마을이 된 이유다.

 

시대의 아픔을 기억하는 역사 탐방






 

지난 92(), 파주시민참여연대는 미군부대와 주변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파주의 역사 탐방을 진행했다. 이날 첫 탐방지는 연풍리였다. 여기서 자란 이용남 사진작가가 이곳을 안내하며 좁은 골목길을 누볐다. 그는 새로 지은 건물 사이사이 곳곳에 남아 있는 기지촌의 건물들을 안내하며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직까지 흑인 클럽 건물이 남아 있는데, 누군가 알려 주지 않는다면 전혀 알 수 없는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기지촌에는 흑인 미군이 지내는 지역과 백인 미군이 지내는 지역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로는 고급 타일로 지어진 목욕탕도 방치된 상태로 남아 있다.

기지촌의 중심에는 당연히 미군부대가 있었다. 당시 미군부대가 주둔했던 장소에 지금은 국군이 그대로 들어와 있다. 아직까지 부대 주변에는 당시 해외 입양소가 있던 건물, 연탄집, 쌀집, 나무 전봇대, 겉에만 시멘트를 바른 흙집 등이 남아 있다.

한편 미군 위안부는 외화벌이의 수단이 되어 한국 정부에 의해 묵인되었고, 누구도 보호해주지 않는 범죄와 인권 유린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당시 관련 건물들도 골목에 남아 지난 슬픈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다음 탐방 장소인 장파리에는 미군이 세운 재건중학교 건물이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도로 쪽 벽만 벽화를 칠해 놓았을 뿐 방치되어 있어 안타까웠다. 재건중학교가 당시 역사를 보여주는 곳으로 활용된다면 좋을 테다. 이어 눈길을 끄는 것은 천주교 공회였다. 1960년대 찍은 사진과 다르지 않은 눈에 띄게 예쁜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당시 가장 핫한 미군 클럽이던 라스트 찬스였다. 이곳에서 역사 탐방단은 지난 아픈 역사를 돌아보며 치유하는 단막극을 낭독했다. 기지촌에서 종종 있었던 부모에게 버림받은 혼혈아를 주제로 한 단막극이었다. 짧지만 울림이 있어 목이 메고 눈시울이 촉촉해지는 극이었다.

이어 라스트 찬스를 보존하면서 현대적으로 재단장한 설치 미술가 윤상규 씨의 설명을 들었다. 조용필이 이 클럽에서 연주하던 시절 얘기부터 앞으로 진행될 마을 사업까지 막힘없이 술술 풀어내는 입담에 사람들은 귀를 기울였다. 특히 오랜 시간 방치되었던 이곳을 특색 있는 문화 공간으로 만든 그의 노력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마을 활성화 위해서는 학예사, 예술가 있어야

 





파주시 장파리와 연풍리가 다시 일어서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지자체들이 흔히 하는 단순 관광 사업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공공 역사박물관이 자리 잡게 해야 한다. 그래야 이곳의 오래된 건물을 온전하게 역사로 보존하면서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 박물관은 그저 건물 하나가 아니다. 박물관에는 역사 큐레이터가 있다.

역사 큐레이터(학예사)는 주변의 오래된 건물을 보존하고 관리하기 위해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에서 관련 재정을 확보하는 관리자이며, 역사 자료를 수집하고 전시하며 홍보를 하는 서비스 제공자다. 이 일은 무척 중요하며, 역사 큐레이터야말로 이곳에 지속적인 도시 재생이 일어날 수 있는 토양을 다지는 핵심 존재가 된다.

이어서 토양에 식물이 자라나게 만드는 존재가 미생물이다. 바로 예술가들이 도시 재생이 일어날 수 있게 하는 생태계의 미생물과 같은 존재다. 미생물의 활동이 시작되어야 다른 생물이 살 수 있듯이, 도시 또한 마찬가지다. , 이곳에서 예술가들이 자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공공 예술가 지원 센터가 들어서야 한다.

예를 들어, 설치 미술가 윤상규 씨가 40년 간 방치된 미군 클럽 라스트 찬스를 재단장하면서 이야기가 있는 문화 공간으로 만들었다. 덕분에 사람들이 찾는 공간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죽은 도시가 다시 살아나는 도시 재생의 구체적인 사례다. 예술가 지원 센터는 적극적으로 이런 일을 지원해야 한다.

나아가 이곳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예술제를 정기적으로 여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미군부대 주변에는 우리가 외면했던 배제의 역사가 있다. 혼혈아, 국제 입양, 미군 위안부 등이다. 예술제는 미군부대 주변에서 일어났던 배제의 역사를 치유하는 길이 된다는 점에서도 바람직하다.

이렇게 토양’(역사)미생물’(예술)이 있어야 식물이 자라 ’(도시 재생)도 피게 된다. 반면 지자체들이 흔히 하는 역사와 예술이 빠진 얄팍한 관광 사업은 결코 도시 재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역사박물관의 큐레이터와 예술가 지원 센터의 예술가들이 있어야지만, 매력적인 이야기와 상상력을 생산할 수 있으며, 그럴 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이 모여들고 시가지가 활성화될 수 있다.

파주시민참여연대가 주최한 이번 역사 탐방에서는 미군부대가 파주에 끼친 영향을 알 수 있었다. 파주의 1960, 70년대는 미군부대를 빼놓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체험의 시간이었다. 나아가 시간이 멈춘 마을을 이제 어떻게 활성화할 것인지, 아픈 역사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지 등을 고민하고 길을 찾게 만드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서상일(자유기고가)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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