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농부 히고니의 텃밭일기 ⑨ 일곱번 이사한 어느 남자의 그럭저럭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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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번 이사한 어느 남자의 그럭저럭 이야기
스물 아홉 벌써 나이를 꽤나 먹었다. 아홉수라서 결혼은 내년으로 미루었다. 남자쪽인 전라도서 할 것인지 여자 쪽인 서울서 할것인지를 두고서 6개월의 줄다리기가 벌어졌다. 전라도 풍습은 남자쪽에서 결혼장소를 정하는 법이라며 양보를 안했다. 여자쪽에서는 딸만 넷이고 큰딸이라서 반드시 서울에서 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서울에서 결혼식은 치루었다. 만원짜리 갈비탕 값이라도 신부측에서 협조했다면 좋았겠지만 그것도 반반 부담하는 선에서 처리되었다.
파주. 열자 아홉자 방 한칸에서 신혼은 시작 되었다. 밤이면 집을 돌아 화장실을 둘이 다녀와야했다. 밖에 사람이 있는지를 몇번 확인해야 일은 끝이났다. 그렇게 두 해가 지나 반지하 방두 개 짜리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인천. 열대야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술 먹고 알몸으로 목욕탕에서 잠든 일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다.
15평 단독 3층에 둥지를 틀었다. 쥐들이 어떻게 들어 왔는지 한 식구가 되어 있었다. 아이가 둘이 되었고 젖 먹이다 힘이든 엄마는 젖병을 삶아서 곰탕을 끓였다. 자욱한 연기를 뚫고 아이들을 구하고 한 달을 환기 시켜 겨우 냄새를 진정시켰다. 1층의 갈비집은 매번 고기굽는 냄새로 식욕을 돋구었다. 덕분에 가족들의 몸무게는 갈수록 늘어갔다.
나중에야 임대차 보호법이 생겨 2년짜리 전세 계약서를 썼지만 1년에 한번씩 임대료를 올려 주어야 했다. 2년을 살고 다시 이사를 했다. 이제부터 일산이다. 이번에는 장인 장모와 시집 안 간 처제 둘까지 대식구가 모여 살았다. 그렇게 힘든 2년을 보내고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되었다. 신도시가 다 그렇듯 일산도 아파트에 90%이상 모여 산다. 비둘기 집처럼 밤이 되면 같은 방향으로 들어가, 지금은 오십층도 넘는 건물에 인간들이 차곡차곡 들어 누워서 잔다. 엑스레이로 찍어보면 참 신기할거 같다. 오층 아파트 생활은 다리를 튼튼하게 만들었다. 아이들도 심부름 하기를 꺼려서 “라면 사올래? 밥 먹을까?” 하면 밥을 먹는다고 했다. 그렇게 2년은 금방가고 다시 이삿날이 왔다.
여섯 번째 이사날에 드디어 집을 장만했다. 아버지가 보태고 은행이 거들고 배산임수 명당자리에 집을 마련했다. 이제 아무 걱정 없이 돈 버는 일만 남은 거다. 월급쟁이는 돈을 벌지 못한다는 책 제목에 속아서 회사를 때려 치우고 개인 사업자가 되었다. 그리고 험난한 길을 걷게 된다.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살았다. 그러나 세상은 훨씬 냉혹했다. 빚은 늘어가고 아이들은 커갔다.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고 전국을 돌고 세계를 옅보았다. 그러다가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 그나마 달랑 하나 남은 집을 처분했다.
새집은 그전에 살던 20평 아파트보다 넓은 단독 2층집의 28평, 옥상과 테라스도 넓었다. 여름에 따뜻하고 겨울에는 시원했다. 매달 내는 월사금은 아파트 관리비나 비슷했다. 주차장은 얼마나 넓은지 10대를 대고도 남았다.
주택 보급률 100%를 넘은지가 오래되었는데도, 지금도 아파트는 계속 지어지고 연립주택 업자는 수도 없이 분양광고를 붙인다. 아이들 때문에 시끄럽다고 방도 내주지 않았거나 쫒겨나야했던 많은 도시빈민들, 부모님 세대들께 존경을 표한다.
자기보다 돈이 백 배 많으면 두려워 한단다. 그렇다면 행복도 백 배가 될까? 자기보다 돈이 천 배가 많으면 고용된단다. 만 배가 많으면 노예가 된단다.
돈 없어도 건강하고 화목하며 가족들과 여행도 다니며 가끔 영화도 보고 공연도 관람하고...그런 꿈을 꾼다. 오늘도, 내일도.
신희곤 도시농부
#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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