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을 건너온 역사 (46) 15. 임진강 림진강 달래강
수정 : 2023-01-27 04:04:11
임진강을 건너온 역사 (46)
15. 임진강 림진강 달래강
(1)임진강에 머문 사람들의 알 수 없는 운명
바닷가 외롭게 핀 바위나리에게 아기별이 찾아온다. 어느 날 하늘 문이 닫히도록 돌아가지 못한 아기별은 외출금지령에 발이 묶인다. 기다림에 지친 바위나리는 모진 바람에 바다로 휩쓸려가고, 밤마다 울던 아기별은 하늘에서 쫓겨나 지상으로 떨어진다.
마해송이 1923년 발표한 ‘바위나리와 아기별’은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화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바위나리와 아기별의 슬픈 사랑을 담은 이 동화는 젊은 마해송의 실제 경험이 바탕이 돼 쓰였다. 개성사람 마해송은 14세에 서울로 진학한다. 그는 종종 경의선을 타고 집을 오갔는데 기차에서 마주친 보통학교 여교사를 사랑하게 된다. 둘은 사랑에 빠졌지만 모두 결혼한 상태였기에 앞날이 순탄할 리 없었다. 둘의 사랑은 도쿄와 베이징으로까지 이어진다. 집안의 반대로 고향 개성에 감금되다시피 한 마해송은 당시의 절실함을 동화로 쓰게 된다. 그것이 ‘바위나리와 아기별’이다. 동아시아 3국을 넘나들던 사랑이 바다와 하늘로 확장돼 표현된다. 경의선이 일본과 중국을 연결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일제의 호출에 시달리던 작가 현은 감시를 피하고 끼니라도 해결할 생각으로 고향인 철원의 소읍 안협으로 숨어든다. 임진강 상류에서 낚시질로 세월을 기다릴 수 있다는 것도 안협을 택한 이유였다.
현은 가끔 만경산을 올라가기도 하고, 임진강 용구소에서 낚시질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여조 유신 허모 씨가 은둔해 있던 곳이라는 두문동을 바라보며 유유자적하기도 하지만 현실은 처음 생각과 많이 달랐다. 챙겨 온 돈은 바닥이 났고 낚시터까지는 십 리나 되는 고달픈 길이었다. 하필 주재소 앞을 지나야 했기 때문에 감시를 피하기도 어려웠다.
이태준은 ‘해방전후’란 작품을 통해 당시의 혼돈스러운 상황과 친일과 지조 사이에서 흔들리던 지식인의 고충에 대해 기술한다. 자전적 소설이다.
마해송의 개성과 이태준의 철원은 각각 경의선과 경원선으로 서울과 연결된 임진강의 중심도시다. 후고구려에서 고려로 이어지며 역사의 중심에 놓였던, 시대의 흥망을 간직한 현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계가 각축을 벌이는 시대에 지방 소도시의 영화란 한때의 추억일 뿐 현재 역사가 펼쳐지는 중심에서는 한참 벗어난 곳이었다. 마해송은 이미 도쿄와 베이징을 드나들고 있었다. 개성은 동화의 배경에도 등장하지 않은 좁은 세계였다. 이태준의 철원 또한 일제의 동원령을 피하기 위해 숨어든 궁벽한 시골마을에 불과했다.
그러면서도 시대와의 끈은 이어져 있어서 맘만 먹는다면 쉽게 서울에 닿는 곳이었다. 중심에는 철도가 있었다. 아버지에게 붙잡혔던 마해송은 떠나기로 결심한 즉시 서울로 도망쳤고 내쳐 일본으로 건너가 버린다. 이태준은 항시 일제로부터 차출명령을 받았고 상경하여 총독부가 개최하는 문인궐기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역사의 무대에서는 비껴나 있었지만 그 자장 안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해방 후 어느 날 철원의 강직한 선비 김직원이 서울의 현을 찾아온다. 철원은 삼팔선 이북이었다. 모험 끝에 서울에 온 김직원은 그러나 어지러운 정치상황을 목격하고 돌아선다.
“이런 서울 오고 싶지 않소이다. 시굴 가서도 그 두문동 구석으로나 들어가겠소.”
세계사의 대사조 속에서 한 조각 티끌처럼 아득히 가라앉아 떠나는 김직원의 표표한 뒷모양은 역사의 자장 안에서 이끌리는 것과 벗어나는 것의 거리를 가늠하게 한다.
가난한 고학생이던 이태준은 지식인으로서 지조를 지키기 위해 항시 흔들렸고 해방 후에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음에도 북한으로 갔다. 부잣집 도령이던 마해송은 시대와 동떨어진 듯 자유로웠으나 해방 후 제국들의 침탈에 경계의 눈빛을 보냈고 남쪽에 살았다. 당시 월북과 월남의 이유를 사상과 정치적 상황으로 흔히들 설명하지만, 그런 갈등이 내면을 흔들었을 것이 당연하지만, 그것만으로 가를 수 없는 이유들이 또한 있었을 것이다.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당시 삼팔선을 기준으로 개성은 이남, 철원은 이북이었다는 것이다. 단지 그들의 고향집이 그곳에 있었기에 남북으로 갈리었다는 설명은 무엇에도 앞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나뉘어 살게 된 것이므로. 이것이 어떤 운명으로 이어질지, 사상과 이념은 차라리 차후의 일이었으므로.
현은 급히 상경하라는 전보를 받고 철원에 나가서야 일제 패망 소식을 듣는다. 현은 코허리가 찌르르해 눈을 슴벅거리며 좌우를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무심들 하다.
“어떻게든 되는 거야 어디 가겠소? 어떤 세상이라고 똑똑히 모르는 걸 입을 놀리겠소?”
독립의 감격보다 알 수 없는 미래를 불안해하던 사람들의 태도, 한 작가를 슬프게 했던 우울한 풍경은 해방의 들뜬 감격보다 오히려 깊은 것이었음을 나중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DMZ생태평화학교 교장 이재석
[임진강기행] [걸어서 만나는 임진강] 저자
#1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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