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원 에세이] “과연 역사는 어떤 물줄기를 따라 흐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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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역사는 어떤 물줄기를 따라 흐르는 것일까?”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처연한 심정으로 녹두장군 노래를 부르던 우리 역사탐방회원들을 버스는 훠이훠이 공주 우금치 전적지에 내려놓았다. ‘동학혁명군 위령탑’ 앞에 헌화를 하고 묵념을 올리는 회원들에게 오늘날 우금치(우금고개)는 나름대로 성지로써의 위상을 갖추고 있었으나, 내 고향 추억 속의 이곳은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낙엽들조차 쓸쓸해 보일 정도로 적막 속에 누워 있었다.
부패한 국가기강과 봉건사회의 계급구조적인 문제점을 바로잡고자 동학 접주들의 진두지휘 아래 변변찮은 농기구를 무기 삼아 일어났던 민초들의 무장봉기가, 일본군과 관군연합군의 총칼 앞에서 이루지 못한 꿈으로 좌절된 채 이 우금치에서 궤멸되었다는 안타까운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곳, 내 어릴 적 들은 바로는 그들이 흘린 피가 산과 내를 시뻘겋게 물들였었다고 읍내 어른들은 말했었다.
50여년 전 우리가 학창시절에 받은 식민사관에 입각한 교육에 의하면 동학혁명은 그저 무지막지한 농민들이 나라를 뒤엎으려고 일으킨 국가전복사건(동학란)에 불과하다고 폄하되곤 했었는데 그런 역사 인식 때문이지 내 어릴 적 우금고개는 금기의 땅이었다.
어른들이 ‘귀신 나온다’고 겁을 주며 못 가게 하던 곳을 친구들과 호기심으로 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 길을 살금살금 올라가 보면 그곳은 어둡고 칙칙한 그늘 아래 먼지를 뒤집어 쓴 잡초들만 우거진 채로 폐허처럼 방치되어 있는 으스스한 곳이었다. 그랬던 곳이 이제는 새로운 역사관에 의해 재평가 받고 또 잘 가꾸어져서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순례지가 되어 있다는 사실에 감개무량 아니 격세지감을 느꼈다고나 할까?
내 어릴 적 공주에는 이 우금고개 말고도 또 하나의 금기의 땅이 있었다. 이름하여 ‘황새바위’라고 불리던 곳으로 천주교 박해 시절에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곳이다. 조선 후기 전국 각지에서 끌려온 사학죄인들이 공주 감영이 있는 이곳에서 처형당하곤 하였는데, 공개적인 처형이 있을 때면 맞은 편 산 위에서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병풍처럼 둘러서서 구경을 하였다고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를 동네 어른들로부터 들었었다. 그리고 공주 외곽 지역에 위치한데다 형무소(교도소)와 지근거리여서 죄수들에 대한 선입견과 함께 더욱 공포감을 주던 곳으로 역시 아이들의 접근이 쉽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 곳 또한 천주교 성지로 개발되어(공주 황새바위순교성지) 이제는 전국에서 찾아오는 신자들에게 신앙선조들의 순교정신을 기리는 거룩한 순례지로 지정되었으니 이 어찌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으랴.
이번 여행길은 충청도 지역의 동학혁명 발자취를 따라가는 코스인데다가 내 고향 공주를 경유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설레며 따라 나섰던 여행길이었다. 게다가 새롭게 조명되는 역사적인 사실들이 참으로 신선하고 충격적이기도 하였으며, 정치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지각 변동을 거듭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둡고 칙칙했던 죽음의 땅이 이제는 밝고 거룩한 성지로 조성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해 준 특별한 경험이었다.
“과연 역사는 어떤 물줄기를 따라 흐르는 것일까?”하는 묵직한 주제를 화두로 던져 준 이번 역사탐방이 오래오래 내 의식의 밑바닥에 많은 사고의 틀로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한다.
글·사진 양재숙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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