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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⑦ 서태후(西太后)의 영광과 치욕

입력 : 2015-01-23 14: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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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西太后)의 영광과 치욕

 

중국 근대사의 주요 등장인물 가운데 서태후는 여성으로서 제국의 최고 권력을 휘둘렀기에 일화가 많아 그에 관한 얘기는 사극의 단골 주제가 되고 있다. 

 

그는 세 황제(동치同治, 광서光緖, 부의溥儀)를 거느리고 반세기(1861~1908년) 가까이 수렴청정을 하면서 근대 중국을 통치했다. 그는 통치 기간 동안에 태평천국 반란의 진압을 위시하여 중국-프랑스 전쟁, 양무운동,유신변법, 청-일전쟁, 의화단의 난을 겪고 수습했다. 신해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 죽었기 때문에 자신이 통치했던 제국의 몰락을 직접 목격해야 하는 고통은 면했지만 그의 통치가 남긴 흔적은 근현대 중국의 큰 멍에가 되었다.

 

그의 업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연구자가 속한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다양하지만 대체로 수구 반동이란 점 때문에 후한 평가는 못 받는 것 같다. 중국에서 52년 동안 선교활동을 벌였고 중국에 관한 수많은 저서를 남겼던 미국인 스미스(Arthur Henderson Smith, 중국명 명은보明恩浦: 1845~1932)는 서태후(자희태후慈禧太后)를 이렇게 평가했다. "중국의 문호를 개방하려던 적대세력의 시도가 실패한 적은 한 두 번이 아니지만 하나의 원인을 찾는다면 이 여성 통치자의 독특한 개성과 재능 때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화원(?和園)은 순전히 서태후의 오락과 피서를 위해 지어진 별궁이었고 전국에서 역대의 진귀 문물과 전적, 서화, 금은보화의 정수를 모아들여 소장하였다. 의화단 난을 진압한 뒤 제국주의 열강 8국 연합군은  1900년 8월에 이화원을  침탈하여 문자 그대로 잿더미로 만들었다. 서태후는 죽은 후에 청 황실 능원인 동능(東陵)에 묻혔다. 1928년의 어느 날 밤, 하급 군벌 손전영(孫殿英)이 군자금에 충당할 목적으로 서태후의 능을 파헤쳐 그가 잠든 관의 뚜껑을 열고 천하의 온갖 보물을 담은 관을 깨끗이 비웠다. 심지어 미라 상태의 시신의 입속에 든 야명주(夜明珠)를 꺼내기 위해 입을 찢었다. 그의 시신은 완전히 나체가 되어 묘실 한 쪽 구석에 팽개쳐졌다. 그가 눈을 감은지 20년 만에 일어난 일이다. 

 

중국 근대사를 상징하는 인물의 인생 전말이 이러했다. 그리고 그것이 중국 근대사의 한 단면이었다.

 

 

 

 

박종일(지혜의 숲 권독사)

 

 

#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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