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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㊼ 봉건의 유래

입력 : 2016-09-02 17: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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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의 유래

 

‘봉건적(封建的)’이라는 표현은 낡고 경직된 사상이나 제도를 일컬을 때 자주 쓰인다. 이 말의 원래 의미는 무엇일까? 봉건은 ‘봉토건국(封土建國)’의 줄임말이다. 《주례(周禮)》에서는 ‘봉(封)’을 ‘制其畿疆而溝封之(제기기강이구봉지)’라 하였는데, 풀이하면 농사감독관인 대사도(大司徒)가 한 지역의 토지를 구획하고 토지의 사방에 도랑을 파서 봉토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봉토에는 도랑을 파 둑을 쌓고 그 위에 나무를 심어 사람들이 넘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제후에게 배타적인 봉토를 인정해주는 것을 봉국(封國)이라 하였다. 봉의 근원은 토지의 경계를 표시하는 일이다. 이러한 원래의 뜻이 지금도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봉함(封緘), 봉쇄(封鎖) 등의 용어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국(國)’은 성(城)의 둘레이다. 고대 중국에서 성은 바로 붙어서 이어지지 않고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 ‘국(國)’들 사이의 빈 공간에는 유목민족(융적戎狄)이 거주했다. 고대 봉건시대에는 농업민과 유목민이 섞여 살았고 전국시대에 이르러 토지가 크게 개발되자 대부분의 백성이 농업을 위주로 생활하게 된다.

 

농업민은 유목민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도랑을 파고 담장을 세웠다. 유목민이나 농업민이나 종족적으로는 하나의 계통이었으나 생활방식이 달라 유목민은 사방을 돌아다녔고 농업민은 정착하여 생활했다.

 

서주(西周)시대는 ‘농업민이 무장하고 경지를 개척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서주 초기에는 ‘국’이 수십 개였으나 후에는 백 수십 개로 늘어났다. 어느 ‘국’도 다른 ‘국’을 소멸시킬 실력이 없어 서주 왕실을 공동의 종주(宗主)로 받들면서 공존하였다. 유목민이 ‘국’들 내부의 틈을 찾아 침입하는 일이 잦아지자 ‘국’이 연합하여 유목민을 변방 또는 산림 속으로 몰아냈다.

 

이렇게 시작된 중국 고대의 제후국은 가장 큰 것이라 해도 면적이 사방 100 리를 넘지 못했다. ‘국’과 ‘국’ 사이의 거리는 대략 50 리였다.

 

봉건지주인 제후는 농사감독관을 두어 농민들에게 농사기술을 가르치고 늘 순시하며 경작상황을 감독했다. 농민의 지적 수준이 낮았기 때문이고 한편으로는 농민이 이반하면 바로 ‘국’ 밖의 유목민이 침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귀족과 농민이 서로 의지하며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나온 토지제도가 정전제(井田制)이다(토지를 井자 모양으로 나누고 중앙은 공동 경작하여 그 수확물은 제후의 수입으로 하고, 중앙을 둘러싼 8조각은 농민의 자경지로 하였다). 서양의 장원은 토지의 소유권이 영주에게 있고 농민은 영지의 토지를 공동으로 경작하는 ‘농노’였다. 중국 고대의 정전제 하에서는 토지는 제후의 소유이기는 해도 농민은 배타적인 토지 경작권을 가진 자경농이었다.

 

공자는 고대에는 이웃 ‘국’이 닭 울음소리가 들리는 정도의 거리에 떨어져 있고, 백성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다른 ‘국’의 백성과 교류할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했고 그런 사회를 이상향으로 생각했다.

 

 

 

글 박종일(지혜의 숲 권독사)

 

 

 

#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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