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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㊾ 우리 곁의 조선족(1)

입력 : 2016-09-30 19:19:00
수정 : 0000-00-00 00:00:00

우리 곁의 조선족(1)

 

중국에 약 2백만명의 조선족이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다. 그들은 왜 그곳으로 이주해갔을까? 그곳에서의 그들의 삶은 우리의 역사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첫 번째 이주의 물결(1620년~1677년). 1619년에 명(明)을 도와 후금(後金)의 누르하치 군대를 치기위해 조선 군대 1만 2천여 명이 중국의 동북지역(이른 바 만주지역)에 파견되었다. 얼마 전 왜란 때에 군대를 보내준 명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 군대를 파견하면서도 후금의 세력이 만만치 않음을 간파한 광해군은 명과 후금의 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비밀리에 조선 군대에게 적극적으로 싸우지 말고 투항하라는 지침을 주었다. 후금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살아남은 수천 명의 조선군 병사, 여기에 더하여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 때에 청의 군대에 붙들려간 수만 명의 조선군 병사와 백성들이 중국 동북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들의 일부는 강제로 청(淸)의 팔기군(八旗軍)에 편입되었고 나머지는 만주족 왕공귀족의 전리품으로서 농노 혹은 빠오이(包衣, 가내 노예)가 되었다.

 

두 번째 이주의 물결(1678년~1880년). 명을 무너뜨린 만주족이 대거 산해관을 넘어 옮겨간 뒤 그들의 발상지인 동북지역은 주인 없는 땅이 되었다. 청 왕조는 이민족이 그들이 발상지에 들어오는 것을 금하였으나(봉금封禁) 자연 재해를 피해 한족과 조선 농민들이 몰래 이주해왔다. 1840년 이후 봉금정책이 해이해지고 마침 조선 북부에 심한 기근이 들어 조선 농민들이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편으로 넘어가 많은 촌락을 이루었다.

 

세 번째 이주의 물결(1881년~1910년). 1875년 청은 수십만 한족 이주민이 정착한 기정사실을 인정하고 동시에 일찍부터 조선의 가난한 농민들이 거주 경작하고 있는 점도 묵인하는 정책을 폈다. 1881년에는 봉금 정책을 공식적으로 폐지하고 훈춘에 간척 관리 관청을 세웠으며, 1885년에는 두만강 북안(지금의 연변지역)을 조선족의 ‘전문개간지역’으로 획정함으로써 조선족의 이민을 장려했다. 러시아가 중국의 동북지역으로 진출해오고 있는 상황에서 동북지역을 적극적으로 개척하여 대응하겠다는 것이 이 무렵 청의 정책변화의 원인이었다.

 

네 번째 이주의 물결(1911년~1931년). 조선을 병탄한 일본은 각종 수탈정책을 동원해 조선의 농민을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주시키고 그들이 떠난 자리에 일본인 농민을 조선반도로 이주해오도록 하였다. 그리고 국권을 상실한 후 망국노가 되기를 원치 않았던 조선인이 대량으로 동북지역으로 이주했다. 중국은 일본세력이 동북지역으로 확장되어 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조선족의 귀화를 강요하고 새로운 이민을 막았다. 이 때 많은 조선족이 중국정부의 압박을 피해 북만주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조선으로 귀환하는 이도 일부 있었다. 중국 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1931년 현재 동북지역 조선족 인구는 63만 명이었다.

 

다섯 번째 이주의 물결(1932년~1945년). 일본은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를 내세워 동북 지역에 만주국이란 괴뢰정권을 세웠다. 중국전체를 삼키기 위한 전진기지이자 병참기지였다. 일본은 만주국을 “개발”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인의 만주국 이주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이때 조선인의 이민은 동북 지역 전체로 확산되어나갔다. 동북지역 조선족의 인구는 1939년에 106만 명, 1945년에는 215만 명이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많은 조선인이 조선반도로 귀환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든 1949년 중국 조선족의 인구는 약 120만 명으로 줄었다.

 

 

 

글 박종일(지혜의 숲 권독사)

 

 

 

#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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