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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72] 전족과 술잔, 풍습 또는 유행

입력 : 2017-10-25 10:30:00
수정 : 0000-00-00 00:00:00

[파주에서 원고] 72

 

전족과 술잔, 풍습 또는 유행

 

박종일

 

중국 여성들의 복식에 전족(纏足)이란 풍습이 있다. 소녀가 어릴 적부터 천으로 발을 싸매어 압박하여 엄지발가락을 제외한 네 발가락이 발바닥에 붙도록 만든다. 압박은 갈수록 강해져 마침내 발은 예각을 이루며 한 곳으로 밀착한다. 발의 주요 골격이 복사뼈 쪽으로 몰려 발은 주먹만한 크기로 퇴화하여 여성 성인이라도 발이 작아 아이 신발처럼 작은 신발 안으로 밀어 넣을 수가 있다.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이 풍습은 대체로 10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 중공정권이 수립된 이후로 정부의 강력한 계도로 점차 사라져갔고 지금은 거의 잊힌 풍습이 되었지만 간혹 시골의 일부 노부인 중에는 전족을 한 사람들이 생존해 있다.

10세기 무렵 당()이 망한 후, 정치적 혼란기에 중국 남방의 한 소왕국 왕이 총애하는 궁녀를 위해 금속으로 큰 연꽃을 만들어 주고 그 궁녀로 하여금 연꽃위에서 춤추게 하였다고 한다. 궁녀는 천으로 발을 싸매고 연꽃 위에서 춤을 추었고 왕은 궁녀의 반달 같은 작은 발을 보고 즐거워했다. 결국 궁녀의 싸맨 작은 발은 보편적인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여자들이 다투어 모방했다.



중국에서 송()대 이후로 작고 뾰족한 발은 미녀가 갖추어야 할 필수 조건의 하나였다. 여인의 작은 발은 여성 신체의 가장 은밀한 부분의 하나로 간주되었고, 여성을 가장 잘 대표하며 성적 매력이 가장 강한 상징이 되었다. 한 남자가 여인의 발을 만진다는 것은 전통적인 관념에 따르자면 바로 성교의 첫걸음을 의미했다. 춘화에서도 여인을 완전한 나체 상태로, 심지어 음부까지 세밀하게 그려냈지만 노출된 전족을 그린 그림은 없었다. 여인의 신체에서 전족은 엄격하게 금지된 구역이었기 때문이다. 예외는 맨발의 관음보살 상이나 하녀를 그린 그림뿐이었다.



만주족이 세운 청 왕조는 한족 남성들에게 만주족의 복식을 따르도록 강제했지만 한족 여성에게는 전통 복식을 허용했다. 한 편으로 청 왕조는 만주족 여인들에게 한족 여성의 복식을 따르지 못하도록 금했다. 만주족 여인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등장한 대체 수단이 만주족 여성 특유의 나막신이었다. 이 신발은 굽이 신발바닥 중앙에 하나만 돌출해 있어서 매우 불편하지만 걸을 때 전족한 한족 여성처럼 뒤뚱거리는 모습을 연출할 수 있었다.

19세기에 중국을 찾아와 관찰한 유럽인들은 전족을 야만적인 풍습이라고 비난하고 그것을 중국 문화 전체의 상징으로 폄하했다. 그러나 당시 유럽에서는 여자들이 허리를 지나치게 졸라매는 복식을 해야 하는 탓에 심장과 폐에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어느 시대 어느 종족이건 여자들은 유행을 따라가기 위해 이런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전족은 유행이라는 단어 하나로 개괄하기 어려운 풍습이지만, 풍습은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유행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이런 속성은 현대 여성 패션에서도 표현된다.

전족한 발이 여성성의 가장 중요한 상징이 되자 여성의 신발은 고유의 용도와는 관계없는 새로운 영역에서 활용되었다. 남성들은 호기를 부리느라 기원에 손님들을 초대하고 기녀들의 정교하고 화려하게 수놓은 작은 신발에 술을 따라 손님을 접대했다. 우리에게도 과거 군사 독재 시절에 술자리에서 접대여성의 신발에 술을 따라 돌리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를 흉내 낸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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