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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84] 원세개(袁世凱)의 조선인 첩들(2)

입력 : 2018-03-29 12:40:00
수정 : 2019-11-18 06:50:31

 

원세개(袁世凱)의 조선인 첩들(2)

 

원세개의 조선인 첩 김씨는 어떤 (중국 쪽)기록에서는 조선의 공주라고 묘사한다. 조선의 공주가 김씨 일리는 없지만 최소한 조선국왕이 혼사에 깊이 간여했을 가능성을 유추해볼 수 있는 단서는 된다. 김씨는 자신이 원세개의 정실부인으로서 출가하는 줄 알았으나 결혼하고 나서야 원세개에게 이미 정실부인과 한 명의 첩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씨와 민씨는 원래 김씨가 출가할 때 친정에서 데려온 몸종들이었으나 원세개는 세 여인을 함께 첩으로 받아들이고 나이 순서에 따라 오씨는 둘째, 김씨는 셋째, 민씨는 넷째 첩으로 정해주었다고 한다. 당시의 기준으로 보자면 김씨는 상류층의 일원이면서 첩으로, 그것도 자신의 몸종과 동일한 지위의 첩으로 출가해야하는 이중적 수모를 겪은 셈이다.

김씨는 다섯 명의 아이(아들 셋과 딸 둘)를 낳았다. 원세개의 둘째아들이자 김씨가 낳은 첫 번째 아이인 원극문(袁克文, 1889-1931)은 조선에서 태어났다. 극문은 어릴 때부터 비범한 천재성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한 번 읽은 책은 결코 잊는 법이 없어 고전에 능통하였고 성인이 된 뒤에는 시작(時作)과 서예에도 당대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중국 전통연극에도 조예가 깊어 극단을 후원하고 자신이 직접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고서화와 골동품 수집에 일가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이 방면의 전문 연구서도 여러 권 출간하였다. 돈을 씀에 있어서 인심을 널리 얻고 호방하여 따르는 협객이 많았다. 1920년대 초에 광동성 일대에 큰 자연재해가 발생하자 수장하고 있던 고서화와 골동품을 팔아 거금을 기부하였다. 이런 행태 탓에 그는 장학량(張學良)과 함께 민국시대의 4공자(公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원세개의 황제등극을 달가워하지 않았기에 아버지와 형으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씀씀이가 커서 재산을 탕진하고 말년에는 궁핍하게 살았다. 42세로 천진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집안에서는 장례 치를 형편이 못되어 그를 추종하던 협객들이 비용을 마련했고 출상 때에는 천진 시내의 기녀 천 여 명이 운구 행렬을 따랐다고 한다.

원극문은 43녀의 자식을 두었는데 그 중 둘째 아들인 가창(家彰)과 셋째 아들인 가류(家騮)는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했다. 원가류((1912-2003)는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물리학자가 되었고 그의 아내 오건웅(吳健雄)동양의 퀴리부인이라 불렸던 물리학자였다. 1973년에 원가류 부부가 일시 귀국하여 수상 주은래를 만났을 때 주은래는 이렇게 말했다. “원씨 집안은 한 세대가 지나갈수록 진보하는구려.” 원가류는 말년에 중국에 정착해 살다가 북경에서 죽었다.

김씨는 임종의 자리에서 아들 극문에게 두 가지 평생의 한을 토로했다고 한다. 하나는 출가한 직후 원세개의 첫 번째 첩으로부터 심한 신체적 학대를 받아 한쪽 다리를 다쳐 평생 다리를 펴지 못한 체 통증을 안고 살아야 했던 고통이었다. 다른 하나는 딸이 첩실로 출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김씨의 친정어머니가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하였고 그로부터 6일 뒤에 친정아버지도 피를 토하고 죽은 집안의 아픔이었다. 함께 첩이된 오씨는 요리를 잘하고 돈 관리에도 밝아 원세개의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김씨는 평생을 웃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고 한다. 민씨는 산후욕으로 일직 죽었다고도 하고 일설에는 자살했다고도 한다.

자주(自主)하지 못한 탓에 남의 나라 첩과 같았던 개화기 조선의 기구한 처지를 원세개의 조선인 첩 셋, 그중에서도 특히 김씨가 상징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이나마 다소간 위로받도록 그들이 누구였는지를 밝혀내야 하지 않을까.....

 

박종일(지혜의 숲 권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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