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이해와오해 [85] ‘표해록(漂海錄)’

입력 : 2018-04-12 11:07:00
수정 : 0000-00-00 00:00:00

 

표해록(漂海錄)’

 



14세기 초에 마르코 폴로가 출간한 마르코 폴로 여행기’(우리에게는 동방견문록이란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를 통해 서방세계는 원()왕조 시대의 중국의 모습을 알게 되었고 이때부터 서방에서는 동방열풍이 일기 시작했다. 마르코 폴로 이후 중국으로 가는 초원길이 막히자 유럽은 중국으로 가는 해양 항로를 찾아 나섰고 이리하여 대항해시대가 열렸다. 상인 출신인 마르코 폴로는 교역의 기회와 물질적 번영이란 관점에서 중국을 관찰했기 때문에 그의 여행기에는 인문적인 내용이 매우 빈약하다. 중국인에게 마르코 폴로 여행기의 존재가 알려진 때는 1874년이었다. 그 해에 상해에서 발행되던 신문 신보(申報)’마르코 폴로 여행기를 소개하는 기사를 실었다. 20세기 초가 되어서야 마르코 폴로 여행기의 중국어 번역본이 나왔다.

마르코 폴로 여행기가 나오고 나서 한 세기가 지나 조선의 관리 최부(崔溥)가 한문으로 쓴 표해록을 내놓아 명()왕조시대의 중국의 모습을 조선사회에 알렸다. ‘표해록마르코 폴로 여행기와 마찬가지로 중국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1992년 한·중수교가 이루어진 후 알려지면서 그 해에 중국어 역주본이 간행되었다. 저자 최부가 중국을 다녀온 지 5백여 년 뒤의 일이었다.

최부(1454-1504)는 공무로 제주도에 갔다가 부친상의 소식을 듣고 배편으로 귀가하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지금의 중국 절강(浙江)성 대주(臺州)시 삼문(三門)현 해안에 표착하였다(1488). 최부 일행은 처음에는 왜구로 의심받다가 신분이 확인되자 중국 관부의 호송을 받아 절강성 영파(寧波)에서 출발하여 대운하를 따라 북경으로 가서 황제를 알현하고 다시 요동지역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표착 6개월 만에) 귀국하였다. 풍부한 고전 지식과 뛰어난 한문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최부는 지나는 곳의 문물, 자연, 인물, 제도, 지리 등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중국 학계에서 최부는 동방의 마르코 폴로라고 비유되고 있고 표해록은 당시의 중국 사정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표해록은 다른 각도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당시 요동반도에 있던 조선인 사회의 모습에 관해 의미 있는 기록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요양(遼陽)에서 계면(戒勉)이란 승려를 만났는데 그는 우리말에 능통했다. 그가 나에게 말했다. “소승은 본래 조선인 혈통인데 조부가 이곳으로 도망쳐 온 지 이미 3대가 되었습니다. 이 지방은 조선의 경계와 가까운 까닭에 이곳에 거주하는 조선인이 매우 많습니다. 중국인은 겁이 많고 용기가 없어서 도적을 만나면 모두 창을 버리고 도망하여 숨어버립니다. 게다가 활을 잘 쏘는 사람이 없어서 반드시 조선사람 중 명나라에 귀화한 사람을 뽑아 정병이나 선봉으로 삼으니, 우리 조선사람 한 명이 중국사람 열 또는 백 명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 지방은 옛날 고구려의 도읍으로, 중국에 빼앗겨 예속된 지 천년이 되었습니다. 우리 고구려의 풍속이 아직 남아 있어서 고려사(高麗祠)를 세워 제례를 올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근본을 잊지 않기 때문입니다.”(‘표해록’, 서인범 등 역, 2004, 한길사, 496)

5백여 년 전에도 요동지역에 조선인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고, 그들은 조선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였으며 요동이 고구려 옛 땅이며 고구려가 조상의 나라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20168월에 대주시 삼문현에 최부 기념관이 세워졌다)



 

 



박종일(지혜의 숲 권독사)   

 


신문협동조합「파주에서」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