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오해 [86] 마파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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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파두부(麻婆豆腐)
마파두부는 중국의 4대 요리 가운데 하나인 사천요리 가운데서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진 요리이다.
청(清)왕조 말기에 사천성(泗川省) 수도인 성도(成都)의 만복교(萬福橋) 곁에 작은 식당이 있었다. 이집 안주인은 얼굴에 마마자국이 남아있고 남편의 성이 진(陳)씨였던 까닭에 사람들이 진마파(麻婆, 곰보 아줌마)라 불렀다. 어느 날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인데도 나루터의 막일꾼 손님들이 꾸역꾸역 몰려와 밥과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값싸고 매운 요리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남은 재료라고는 두부 몇 모와 쓰고 남은 쇠고기 한 조각뿐이었고 재료를 사러 나가기에는 늦은 시각이었다. 진마파는 급히 머리를 짜내 두시(豆豉, 우리의 청국장과 비슷한 식재료)를 냄비에 넣고 기름으로 볶은 후 물을 붓고, 손톱크기만 하게 자른 두부조각을 넣고, 잘게 다져 바싹하게 튀긴 소고기를 넣고, 마지막으로 매운 고춧가루를 위에다 뿌려 그릇에 담아 내놓았다. 손님들은 땀을 흘려가며 이 뜨겁고 매운 요리를 반찬으로 삼아 몇 그릇씩 밥을 비웠다. 그 후 이 두부요리는 서민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고 진마파 식당의 간판요리가 되었다.
진마파 자신의 성은 온(溫)씨, 소녀 적 이름은 교교(巧敎), 열일곱 살에 목재상의 넷째아들인 진지호(陳志灝)에게 시집갔다. 부부의 금슬은 너무 좋아서 손위 동서들의 질시를 받았고 동서들의 고자질 때문에 시어머니도 교교를 싫어하게 되었다. 부부는 약간의 현금과 세 칸짜리 집 한 채를 받아 분가하였다. 한 칸은 부부 자신들이 거주하고 한 칸은 양고기 푸줏간으로, 한 칸은 두부가게로 세를 주었다. 진지호는 생계를 위해 기름 짜는 방앗간에서 관리인으로 일했다. 그런 가운데 진지호의 여동생 숙화(淑華)가 올케들과 사이가 나빠져 집을 나와 이들 부부와 함께 살게 되었다. 교교와 숙화 두 사람의 시누올케는 사이가 매우 좋았다.
성도 부근 농민은 유채를 재배하여 기름을 짜서 생활하는 사람이 많았다. 진지호는 기름을 짜러 오는 농민들은 물론이고 기름을 운반하는 노동자들에게도 친절하고 성실하게 대해주어 두터운 인심을 얻었다.
부부가 사는 집은 이런 농민과 노동자들이 방앗간으로 왕래할 때 반드시 거쳐야하는 길목에 있었다. 사람들은 진지호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지나갈 때마다 무언가 작은 선물을 들고 와 놓고 갔다. 이럴 때마다 교교는 왼쪽 옆집 푸줏간에서 양고기를 사오고 오른쪽 옆집 두부가게에서 두부를 사와서 음식을 만들어 대접했다. 이런 평온한 생활을 해온지 10여년이 지난 1901년에 진지호가 강을 건너다 배가 뒤집혀 물에 빠져 죽었다. 뒤에 남은 교교와 숙화는 생계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생전의 진지호를 기억하는 농민들이나 짐꾼들이 두 여인을 보살폈다. 어떤 사람은 쌀을 들고 오고, 어떤 사람은 채소를 들고 오고, 어떤 사람은 왼쪽 푸줏간에서 양고기를 사오고, 어떤 사람은 오른쪽 두부가게에서 두부를 사와 두 여인에게 음식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고 나서 나갈 때면 요리를 해준 수고비로 얼마간의 돈을 놓고 갔다. 식당은 처음에 그렇게 시작되었고, 마파두부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식당은 차츰 번성했다.
교교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양자를 들인 적은 있으나 양자는 곧 집을 나갔다. 숙화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 1934년 시누이 숙화가 병으로 쓰려졌다. 그 다음 해에 올케인 교교도 병으로 쓰러졌다. 그 해에 두 시누올케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떠났다.
노동하는 보통사람들의 인정과 의리가 합쳐져 만들어진 마파두부는 이제 세계에서 중국을 대표하는 요리가 되었다. 2010년에 마파두부는 성도를 대표하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박종일 지혜의 숲 권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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