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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의 [내운명을 바꾼 한글자] (36) 상처(scar)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 스카프(scarf)처럼 빛나게 하는 것이 사랑이야! 

입력 : 2021-03-24 06:00:28
수정 : 0000-00-00 00:00:00

이강석의 [내운명을 바꾼 한글자] (36) 상처(scar)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 스카프(scarf)처럼 빛나게 하는 것이 사랑이야! 
 

영화로도 많이 알려진 ‘완득이’, ‘우아한 거짓말’의 작가 김려령의 장편소설 ‘너를 봤어’(2013, 창비)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폭력’과 ‘사랑’을 다룬다. 폭력 중에서도 ‘근친 폭력’을, 사랑 중에서도 ‘지리멸렬한 삶일지라도 끝내 버릴 수 없는, 그러면 안되는 사랑’을 소설 속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아버지와 형으로부터 받은  ‘폭력’과  어머니의  '거짓'에 상처받으며 지내온 유년시절과, 허울 좋은 인기작가였지만 '사랑'도 '정'도 없는 결혼 생활을 이어온 게 삶의 전부인 정수현. 
사는 게 내내 사막인 수현에게 단비 같은 존재인 서영재를 문학상 시상식에서 처음 만난다. 
지옥 같은 삶을 살던 수현이 발랄하고 화사한 영재를 통해 구원의 빛을 보았다.

‘몰라. 그냥 좋아. 처음으로 내 것이었으면 하는 사람을 만났다. 내가 가졌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 또 그렇게 나를 가졌으면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기까지 사십육년 걸렸다.’

 

 

하지만 영재에 대한 수현의 생각은 결국 ‘우리가 지금 하는 것이 제발 사랑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영재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로 귀결된다. 
수현에게 상처로 온 몸에 새겨진 폭력이 아버지,형, 아내의 죽음과 직접적인 관련으로 이어지기에 영재와의 ‘생애 최초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도, 받아들여서도 안되었다. 자신을 둘러싼 죽음의 기운이 영재에게도  닿으려 했기 때문이다. 또한 수현이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악마같은 모습을 보였을 때 스스로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 수현은 저수지에 몸을  던져 죽음으로써 스스로의 사랑을 완성한다.
문학의 기능 중에 ‘결핍의 보상’이라는 것이 있다. 수현은 어린 시절의 불행,분노,상처가 글쓰기를 통해서 치유를 얻을 수도 있었다.

‘지나치게 정석의 코스를 밟아 누구는 내게 그래서 고생살이 없다고 한다. 그것(문학)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던 도피와 떨쳐낼 수 없는 두려움과 서러움을 그들은 몰랐다’

(김려령 작가도 ‘작가 후기’에 죽이고 싶은 사람이 많아 소설을 쓴다고 했다. ‘살인 충동’이 아니라 죽이고 싶은 일이  상처와 상처로 일어난 모든 일을 뜻할 것이다.) 

처음으로 겪어보는 사랑을 통해 수현이 ‘잃어버린 삶의 보상’을 얻을 수도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락같은 가족관계와 내면 깊숙히 뿌리를 내린 폭력과 죽음의 그림자는 한발자국의 사랑의 동반도 허락하지 않는다. 죽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불행을 막으려는 수현의 선택.

수현은 과연 진정한 사랑을 얻었을까? 소설은 이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목숨으로 흥정하는 사랑은 죽어서도 그것을 얻지 못한다. 사랑은 흥정이 아닌 삶의 모습으로 얻는 것이다.’ 

‘사랑은 잘 놀고 있는 고무줄 끊고 도망가는 게 아니라, 무거운 쓰레기통을 살짝 들어주는 거거든.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헛갈리게 굴지 않는다고. 고무줄 끊는 건 진짜 나쁜 놈도 하잖아. 사랑은 앞뒤 잴 것 없이 명확한 거야.’ 

소설의 주인공 정수현에게 내가 들려주고 싶은 말도 있다.

scarf - scar 
상처(scar)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 스카프(scarf)처럼 빛나게 하는 것이 사랑이야! 

이 글을 읽은 여러분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아리고 아련하고 아이러니하지만 아름다운 아우라를 가진 
‘너를 봤어!’ 

< ‘너를 봤어’ 속 문장들 > 

1. 붉은 거짓말. 때로는 그것이 어머니의 피를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11
2. 의식된 행동을 의식하지 못한 척 하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16
3. 말걸지 않고 말하지 않는 껄끄러운 고요
4. 입은 닫았을 때 귀하고 손은 움직일 때 귀하다. 사람은 위에 있을 때를 봐라. 아래에 있을 때는 누구나 얌전하다. 존경하되 비굴하지 말고 거느리되 군림하지 마라 38
5. 사기는 돈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치는 겁니다
6. 영재의 좋은 점이다. 뭐 먹을래? 아무거나요, 따위의 말을 하지 않는다. 삼겹살, 꽃게튀김, 참치, 막국수, 홍어회무침...... 즉각적이다 78
7. 이렇게 쓰겠다고해서 그대로 써지는 글 못 봤고, 엄청난 스케일의 구상안에 미리 놀란 것치고 결과에도 놀란 작품 많이 보지 못했다 87
8. 정이라도 붙여보려고 했다. 그러나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에게는 미운 정마저 가지 않았다 99
9.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아프다 102
10. 아내는 편집자들이 싫어도 싫은 내색을 할 수 없는 피곤함마저 즐겼다 106
11.서로 나름의 진심으로 대했지만 지나치게 계산된 진심이었다 107
12. 사랑은 잘 놀고 있는 고무줄을 끊고 도망가는 게 아니라, 무거운 쓰레기통을 살짝 들어주는 거거든.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헛갈리게 굴지 않는다고. 고무줄 끊는 건 진짜 나쁜 놈도 하잖아. 사랑은 앞 뒤 잴 것 없이 명확힌 거야 117
13. 하늘도 맑고 바람도 좋은데 나는 늘 왜 아픈지, 너럭바위에 누워 눈물을 훔쳤다 118
14.  그냥 좋아. 처음으로 내 것이었으면 하는 사람을 만났다. 내가 가졌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 또 그렇게 나를 가졌으면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기까지 사십육년 걸렸다 124
15. 산다는 게 이토록 누추할 줄이야 130
16. 아내는 글 쓸 때가 가장 좋다고 했고, 영재는 글 쓸 때가 가장 아프다고 했다. 그럼에도 아내는 소설이 일이라 했고, 영재는 놀이라고 했다 134
17. 순수한 것인지 순진한 것인지 답답하기도 했다 146
18. 분명 내가 들여다보지 못한 삶의 행간이 있을 것이다 155
19. 질투는 가진 게 많을수록 심하다. 아내는 자기 것이 줄어드는 것을 빼앗긴다고 생각했다 158
20. 하루살이가 전등에 부딪치는 소리마저 크게 울릴 만큼의 고요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169
21. 알고 있는데 의식 너머의 간절함이 나를 막지 못했다 170
22. 끝난 사랑 싫은 사랑은 반드시 몸으로 드러난다. 눈이 보기 싫어하고, 귀가 듣기 싫어하며, 심장이 숨쉬기를 거부한다 181
23. 전국 장터를 놀이터처럼 다니는 영재답게 장터에서 사온 온갖 것이 냉장고에 그득하다 183
24. 사랑은 매우 비합리적 감정이었어. 대책없이 몸과 마음이 막 달려가는 미친 현상이야 193
25. 내가 하고 온 것이 사랑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아무 때나 달려가고 싶고, 그렇게 내게로 왔으면 좋겠고, 지금도 간절히 그러하다는 것뿐 201
26. 지리멸렬한 삶일지라도 끝내 버릴 수 없는, 그러면 안되는 사랑 203

< 김려령의 작품들 >

1. 기억을 가져온 아이 (2007)
완득이 (2008)
요란 요란 푸른 아파트 (2008)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2011) 
너를 봤어 (2013)
탄탄동 사거리 만복전파사 (2014) 
가시 고백 (2012)
우아한 거짓말 (2014)
트렁크 (2015)
샹들리에(2016) 소설집
플로팅 아일랜드 (2017) 
일주일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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