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 119 - 중국(민국시기)의 4대 미남
수정 : 2020-11-10 09:39:20
[이해와 오해] 119
중국(민국시기)의 4대 미남
저술가 박종일
중국인의 술자리에서 중화민국 시기의 4대 미남에 관한 얘기는 술안주처럼 자주 오른다. 중국 현대사에서 격동의 시기인 민국시기를 살아간 네 사람 미남의 외모에 대한 세간의 평가와 인생행적을 더듬어 보는 것은 의미가 없지는 않을 터이다.
왕정위(汪精衛,1883-1944년): 동시대의 중국 작가 서지마(徐志摩)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정말 미남이다. 그가 여자였더라면 나는 죽도록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크고 맑은 그의 눈동자는 횃불 같은 강렬한 빛을 뿜는다.” 왕정위는 청년시절엔 혁명을 꿈꾸며 손문을 추종했다. 청년 왕정위가 광주(廣州)의 거리에서 연설을 할 때면 여학생들이 “던지는 꽃송이가 비처럼 떨어졌다.” 그러나 중간에 변절하여 일본의 허수아비가 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장개석(蔣介石)이 그의 묘를 폭파하라는 명을 내렸다. 유골도 관도 먼지가 되어 날아갔다.
주은래(周恩來, 1898-1976년): 너무나 유명한 인물이니 그의 인생행적에 대해서는 소개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동시대인이며 미국의 외교관으로 반생을 중국에서 보낸 존 서비스(John S. Service)는 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주은래를 한 번 만난 사람은 그를 잊을 수가 없다. 가장 강한 인상은 그의 눈에서 나온다. 짙고 검은 눈썹 아래에 맑게 빛나는 두 눈이 당신을 응시하면 그가 온 마음을 다해 당신을 바라본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는 단번에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천부적인 외모와 재능을 갖추고 있다.” 주은래는 외모만이 아니라 매력적인 정신세계를 갖춘 인물이었다.
매란방(梅蘭芳, 1894-1961년): 민국시기 최고의 경극배우이다. 그의 여성역 연기는 전설적이었다. 당시의 유행어에 “매란방 같은 아내를 얻어 주신방(周信芳) 같은 아들을 낳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있었다(주신방은 매란방과 같은 시기에 활약한 남성역 인기 경극배우), 또 이런 말도 있었다. “남자는 모두 매란방을 아내로 맞으려 하고 여자는 모두 매란방을 남편으로 맞으려 한다.” 중국 현대 만화의 개척자이자 대가인 풍자개(豐子愷)는 그의 미모를 이렇게 평했다. “서방의 심미 기준에 의하면 매란방의 몸매는 비너스와 아름다움을 겨룰만하다. 게다가 부드러운 손동작과 맑은 목소리는 창조주의 걸작이다.” 그는 진취적인 정치의식도 갖추고 있어서 중국혁명과 항일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2차 대전이 끝난 후 중국 희곡연구원 원장, 전국인민대표직에 있었다.
장학량(張學良, 1901-2001년): 민국시기 4대 미남 가운데서 서민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인물이다. 동북군벌 장작림(張作霖)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가 (일본군에게) 일찍 살해당하자 스무 살의 나이로 아버지의 자리를 이었다. 외모도 준수했지만 젊고 권력을 가진데다 여러 가지 재능을 갖추고 있었고(그는 영어와 시에 능통했고 운동도 만능이었다) 매너도 좋아 여성들의 흠모의 대상이었다. 그는 이런 시를 지었다. “예부터 영웅은 모두 호색하였으니 호색하지 않으면 영웅이 아니다. 나는 영웅도 아니면서 영웅처럼 호색했다.” 그런데 그의 행적가운데서 가장 극적인 것은 여성편력이 아니라 정치행로이다. 1936년 36세의 청년 군벌 장학량은 서안(西安)사변을 일으켜 장개석에게 공산당에 대한 탄압보다 항일전쟁을 먼저 하도록 강요했다. 이 사건은 중국 현대사의 물길을 바꾸어 놓았다. 장개석은 장학량의 요구대로 정책을 바꾸지만 장학량에 대한 처벌과 복수로 그를 연금한다. 그에 대한 연금은 1936년부터 1990년까지 54년 동안 지속되었다(장개석은 타이완으로 철수하면서도 장학량을 데리고 가 연금을 계속했다. 장개석은 1975년에 죽었으나 연금은 그 뒤로 15년이나 더 계속되었다). 장학량은 1995년에 하와이로 갔다가 2001년에 그곳에서 101살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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