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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117] 100년 전의 아이돌

입력 : 2020-08-20 10:02:24
수정 : 2020-08-20 10:21:36

이해와 오해 [117]

100년 전의 아이돌

저술가 박종일

 

 

블랙핑크라는 여성 아이돌그룹이 미국의 TV 인기 쇼 프로그램에 나가 인터뷰하는 장면을 보았다. 다들 태도가 당당하고 노래 솜씨도 대단하고 외모도 잘 생겼다. 한국의 젊은이들, 특히 여성들이 이제는 어디 나가도 밀리지 않겠다는 느낌이 들자 슬며시 맘속에서 국수주의적 자부심이 일어났다.

한 세기 전의 여성 아이돌은 어떻게 활동했을까? 그들의 개인적 삶은 어땠을까?

우리나라의 현대적인 대중가요는 1920년대 중반에 진보적인 연극단체인 토월회의 막간가수들에 의해 보급되었다. 우리나라의 첫 여배우는 1921년에 무성영화 월하의 맹세에 출연한 이월화(李月華, 1904?∼1933)였고 현대가요의 첫 여가수는 윤심덕(尹心悳, 1897~1926)이었고 막간가수로 활약했다. 같은 시기에 활약한 이애리수(李愛利水, 1910~2009)는 가극의 첫 여배우였고 첫 여주인공이기도 했으며 막간가수로도 활약했다. 그의 대표곡은 널리 알려져 있는 황성옛터이다. “토월회의 유명한 비극배우이자 막간가수 이경설(李景雪, 1912 ~ ?)은 오늘날까지도 전해오는 방랑가를 불렀다.

 

이경설 

 

이 시기의 막간가수들이 부른 대부분의 가요는 나라를 잃은 시대의 탓인지 비탄조가 주류를 이루었고 몇 안 되는 여가수들의 개인사도 참으로 비극적이었다. 가요계의 혜성으로 불리던 윤심덕은 1926년에 일본 오사카에서 11곡의 노래를 레코드에 취입하고 귀국하던 배위에서 연인인 극작가와 함께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했다. 이때 취입한 사의 찬미는 자살사건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노래제목 때문인지 민족적 애창곡이 되어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경설은 1930년대 초에 부른 방랑가가 금지곡으로 묶이자 레코드사로부터 아무런 보수도 받지 못하고 병든 몸으로 순회 공연하던 중에 객사했는데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잃어버린 고향(1925년 발표)을 부른 가수이자 서도민요 가수였던 박연옥은 가요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중국 용정으로 건너가 조국을 떠나온 실향민 부락을 찾아다니며 기존의 계몽가요에다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내용의 가사를 붙인 노래를 부르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옥사했다.

 

이화중선 

 

남도창의 명가수였던 이화중선(李花中仙, 1898~ 1943) 역시 일본의 실향민을 찾아가 순회공연 중에 객사하였다. 이애리수는 기혼 남성과 사랑에 빠져 동반자살을 시도했다가 동료들의 의해 간신이 목숨을 구했다(그래도 그는 정상적?으로 결혼하고 가요계를 은퇴하고 보기 드물게 장수했다).

첫 여성 아이돌이 무대에 선 뒤로 백년이 지났다. 지금 이 나라는 최소한 부끄럽지 않은 나라이고,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도 많이 걷혔다. 한국의 여성 아이돌그룹이 맘껏 끼를 펼치기 바란다. 물론 남성 아이돌그룹도!

(사족: 윤심덕의 투신자살은 연인과 함께 사전에 계획한 행동이 아니었다는 다른 강력한 해석도 있다. 윤심덕은 조선총독부의 장학금을 받아 일본 음악학교에서 공부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성악가이다)

#1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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