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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109] 새해와 낡은 해  

입력 : 2020-01-11 11:57:59
수정 : 2020-01-28 01:39:19

이해와 오해 [109] 새해와 낡은 해  

 

                                                   저술가 박종일 

 

1789년에 프랑스 대혁명이 폭발했다. 1792년에 프랑스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공화국 정부는 그 해를 공화국 원년으로 선포했다. 더 나아가 1793(공화국2)부터는 그때까지 사용하든 그레고리우스력과는 다른 새로운 역법을 시행했다(대중의 불만 때문에 1806년에 그레고리우스력으로 역법으로 돌아갔다).

 

    그레고리우스 8세(1575~1585년 재위)

 

새로운 역법은 연도뿐만 아니라 월의 계산 방식도 바꾸었다. 예컨대, 서기 180111일은 새로운 역법에 따르면 공화국 94(Nivôse, 의 달) 11일이 된다. 이슬람력은 선지자 무하마드가 메디나로 옮겨간(hijra) 서기 622716일을 기원(紀元)으로 친다. 서기 180111일은 이슬람력으로는 12158월의 어느 날이 된다. 서기 1801년은 타일랜드 등 불교국가에서는 불기 2343년에 해당하고 유태력으로 계산하면 5561년이다. 중국에서 이 해는 가경(嘉慶) 5년 경신년(庚申年)이었다. 서양인들에게 1801년은 19세기라는 새로운 세기,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해이지만 중국인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새로운 기원의 시작은 1800년이나 1801년의 첫날이 아니라 179629일이었다. 이날은 재위 60년의 건륭(乾隆)황제가 황위를 15번째 아들 옹염(顒琰)에게 물려주는 날이었고 옹염은 즉위한 뒤 연호를 가경으로 정했다.

 

 

베트남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서기를 받아들인 나라였다. 1802년 통일 뒤에 베트남 정부는 특수한 정치적 목적 때문에 서기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으나 민간에서는 명()나라의 역법을 그대로 사용했다. 중국에서 이 역법은 1644년 명 왕조가 멸망한 후 바로 폐기되었다. 1801년을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해고 기념하는 곳은 기독교가 성행한 지역뿐이었다.

유럽에서도 역법의 통일은 완만한 과정을 거쳤다. 그레고리우스력은 1582~1584년에 카톨릭 국가에 소개되었고 얼마 뒤 스페인의 해외식민지에 전해졌다. 1600년에는 스코틀랜드가 그레고리우스력을 도입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와 전체 대영제국이 그레고리우스력을 받아들인 것은 그로부터 170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루마니아, 러시아, 터키가 정식으로 그레고리우스력을 받아들인 것은 각기 1917, 1918, 1927년의 일이었다.

그레고리우스력은 근대 유럽의 가장 성공적인 문화수출품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레고리우스력은 사실은 전혀 새로운 역법이 아니라 율리우스력을 기초로 하여 기술적으로 개량한 것이었다. 종교개혁을 반대하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8(1575~1585년 재위)가 새로운 역법의 제정을 주도하였지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역법을 지구상에서 가장 구석진 곳까지 전파한 나라는 개신교 국가인 영국이었다. 유럽의 식민지 이외의 지역에서 그레고리우스력의 도입은 대부분 자발적 선택이었으며 문화적 패권주의가 강요한 결과는 아니었다.

러시아의 동방정교회는 아직도 개량되지 않은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고 있다. 고대 로마의 대사제였던 율리우스가 고대 그리스와 이집트 천문학자들의 고전적인 시간관념을 기반으로 하여 역법을 제정했다(기원전 45). 이 역법을 수백 년 동안 사용해본 결과 몇 년 만에 한 번씩 1년에 며칠을 추가해야 하는 결함이 있었다.

오스만제국과 그 후신인 터키에서는 상황이 더 복잡했다. 선지자 무하마드는 달을 시간을 측정하는 기준으로 정하고 음력이 유일하게 유효한 역법이라고 선포했다. 그런데 민간에서는 비잔티움 시대의 율리우스 태양력을 사용하던 전통도 남아 있었다. 오스만 궁정은 태양력을 사용하는 것이 국가통치 면에서는 더 간편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절을 기준으로 하여 회계연도를 나눈 역법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농산물을 현물세로 거두어들이자면 이런 방식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양력과 음력 사이에는 어떤 직접적인 연관성도 없고, 따라서 두 역법 사이에 중복과 엇갈림은 피할 수가 없었다. 지구상에서 지금까지도 토착역법과 그레고리우스 역법이 함께 사용되고 있는 지역이 적지 않다.

세계 각지의 화교들은 한곳의 예외도 없이 음력을 기준으로 신년을 축하한다. 각종 전통"과 현대의 역법 이외에 새로 발명된 역법도 적지 않다. 어떤 신흥 민족국가에서는 과거의 역사와 건국사를 기념하기 위해 상징적인 좌표국경일, 영웅기념일 등를 설정한 역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란의 바하이(Bahā'i)교는 창시자가 득도한 1844년을 기원으로 설정하고 1년은 19개월, 한 달은 19일인 독특한 역법을 사용하고 있다. 타이완은 청 왕조를 무너뜨린 혁명이 일어났던 1912년을 원년으로 하고 혁명으로 인해 성립된 공화국을 의미하는 민국(民國)”이란 연호를 사용한다.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한 뒤에 중국 대륙에서는 서기를 채택했다. 일본도 지금까지 천황의 연호로 연도를 표시한다. 이 기년법에 따르면 1873년은 메이지(明治) 6년이 된다. 일본은 이 밖에도 1869년의 칙령에 따라 일본 신화에 나오는 태양신의 후예인 신무(神武)천황이 즉위한 해(서기 기원전 660)를 원년으로 하는 기년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기년법에 따르면 1873년은 황기(皇紀) 2533년이 된다. 허구의 황기는 2차 대전을 겪으면서 일본 민족주의의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일본은 1873년부터(러시아보다 반세기나 앞서) 그레고리우스력을 도입했다. 천황은 이 해 음력 119일에 조서를 내려 음력 123일을 양력 187311일로 한다고 선포했다. 조서는 현대화를 찬양하고 음력은 미신과 후진성의 표지라고 비난했다. 그런데 갑작스런 역법 개혁의 근본적인 목적은 파탄상태에 빠진 국가재정을 구출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역법을 시행하자 정월 초하루가 갑자기 29일 앞당겨졌다. 게다가 음력을 기준으로 한다면 새해에는 윤달까지 들어 있었으니 정부의 입장에서는 두 달 치의 정부지출을 줄일 수 있었다.

날과 달과 해를 계산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은 문화마다 나라마다 다르다. 그리고 시간은 공간처럼 금을 그어 표시되거나 분할되지도 않는다. 그래도 얼마 후면 2020년 새해가 시작된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지만 낡은 해는 가고 새해는 온다. 마음을 가다듬고 새해를 위한 새 꿈을 꾸자. 꿈을 이루는 첫걸음을 꿈을 꾸는 것이니까.

 

#1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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