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 [105] 망언의 뿌리
수정 : 2019-09-05 03:29:40
이해와 오해 [105]
망언의 뿌리
번역가, 자유기고가 박종일
▲ 탈아론
1952년에 미국의 ‘강력한(?) 주선’으로 한국과 일본 두 나라는 국교정상화 회담을 시작했다. 1953년 10월 제3차 회담에서 한국 측이 식민지배 피해보상을 요구하자 일본 수석대표 구보다는 이렇게 반박했다. “일본은 철도와 항구를 건설하고 농지를 조성해주었으며 대장성은 한 해에 많게는 2천만 엔까지 주었다. 그래서 보상은 이미 상쇄되었다. 미·일간에 강화조약이 체결되기 전에 한국이 독립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다” 이것이 유명한 ‘구보다 망언’의 골자이다.
토쿄 우에노공원에는 칼을 찬 사무라이 모습의 사이고 타카모리 동상이 서있다. 그는 메이지 유신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며 ‘정한론(征韓論)’의 주창자이다. 정한론은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그 발진기지로서 한국을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한론이 나온 이후로 조선침략은 일본의 최대 국가과제가 되었다. 즉각적인 무력침공을 주장하는 무단파(사이고 타카모리, 야마카타 아리토모, 테라우지 마사요시 등)가 있었고 조선 내부의 분열을 이용하자는 공작과 회유론을 주장하는 문치파(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카오루 등)가 있었다. 침략의 논리는 탈아론(脫亞論, 일본은 서구열강과 벗하며 그들을 본받아 아시아를 침략하여 개화시키자)과 흥아론(興亞論, 아시아민족이 같은 황인종인 일본을 맹주로 받들고 서구열강을 아시아에서 물리치자)으로 나뉘어 경쟁했다. 탈아론은 제국주의적 식민주의로 발전하고 흥아론은 대륙침략론으로 발전한다.
▲ 탈아론의 창시자 후쿠자와 유키치, 게이오 대학을 창설하고 갑신정변의 주역들을 후원했다.
탈아론의 창시자는 후쿠자와 유키치다. 그는 일본의 게이오대학을 창설했고 갑신정변의 주역들을 후원했으며(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이듬해에 탈아론을 발표했다) 그의 인물상은 전후 일본의 1만 엔 권 지폐를 장식했다. 흥아론의 주창자는 다루이 토키치다. 흥아론은 인종적 친근성과 서구열강에 대한 저항감을 부추겨 침략성을 은폐하는 기묘한 논리를 갖고 있었고 일본 군부는 이를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이란 논리로 위장하여 대륙침략을 정당화했다.
▲ 아시아 민족이 일본을 맹주로 받들고 서구열강을 아시아에서 물리치자는 흥아론 포스터
침략의 형태는 다양하다. 영국은 원료공급지와 상품시장의 확보를 목표로 하는 경제적 식민주의를 지향했고 러시아는 인접국을 병합하여 인구와 영토를 넓혀가는 영토 확장주의를 추구했다. 지배방식에 있어서는 영국은 간접통치와 자치주의를 선호했고 프랑스는 직접통치와 동화주의를 우선했다. 어느 경우든 종교와 문화의 전파를 전면에 내세워 침략의 본질을 호도했다.
경제수탈 목적과 함께 군사적 목적을 띤 일본의 조선침략은 지배정책과 수탈방식에서 특이한 양식을 취했다. 일본은 영토 확장주의를 추구하면서 오로지 수탈과 군사목적의 효율을 극대화하는 데만 초점을 맞춘 개발정책을 시행했다, 영토 확장주의는 곧바로 민족말살 정책으로 연결되었다. 이것이 일제 강점기 산업, 행정, 교육정책의 바탕이었다. 지금 우리를 슬프고도 분노하게 만드는 위안부, 강제징용, 내선일체, 동조동근론, 식민지근대화론 등의 발원지가 또한 이것이다.
우리는 일본에게 역사적 반성과 사과를 요구하지만 위에서 열거한 논리로 무장하고 역사를 해석하는 일본은 다음과 같은 자기합리화의 논리를 펼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인종적 뿌리가 같은 조선을 일본이 구제해주려던 성스러운 전쟁이다. 서양과는 달리 일본은 조선을 무력으로 식민화하지 않았으며 대한제국 황제와 조선백성의 청원을 받아들여 합법적 시혜적으로 조선을 합병했다. 일본은 조선을 근대화시켜주었다. 대동아전쟁은 아시아에서 서구열강을 내쫓기 위한 아시아 민족해방전쟁이었다.”
1945년 2차 대전이 종결된 후 미국은 세계전략과 동아시아정책의 필요 때문에 패전국인 일본의 제국주의 시대의 구조와 체제를 거의 그대로 유지시켰다. 미국의 전략은 중국과 소련의 태평양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을 보루로 삼고 한국을 그 아래 부속 전초기지로 묶어 두는 것이었다. 전범국인 일본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고 식민지에서 해방된 한국을 (미국이 독점할 수 없으니까) 분단시키는 역설이 그래서 현실구조가 되었고, 그 구조는 공고하게 정착되어 70년이 더 지난 지금도 잘 유지되고 있다.
한국은 1965년에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일본적 역사인식과 논리에 따라 한일협정을 맺었다. 황국신민으로 교육받은 일본 사관학교 출신의 박정희가 세운 정권은 ‘배상’도 ‘보상’도 아닌 ‘경제협력자금’ 명목으로 돈을 받고 36년 동안의 식민지배가 합법이라 해석될 수 있는 애매한 조약을 맺었다. ‘망국조약’이라 규탄하는 시민 학생의 반대와 저항을 박정희는 계엄령으로 진압해버렸다.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일본으로부터 사과 한마디도 받지 않고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하려다가 사달이 나고 말았다. 일본에서는 2차 대전 종결 직후에 A급 전범이 방면되어 수상이 되었고 세월이 흐르자 그의 손자가 또 수상이 되어 한국을 ‘신뢰할 수 없는 나라’, 제재의 대상으로 몰아가고 있다.
다시 맞는 광복절에 요즘의 한일 간의 갈등을 보면서 한 역사가의 경고를 떠올린다. “역사는 기억하지 않으면 되풀이 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1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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