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 [101] 네 개의 선언서와 네 사람
수정 : 2019-06-28 08:49:50
이해와 오해 <99>
네 개의 선언서와 네 사람
지혜의숲 권독사 박종일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다. 관련된 여러 행사에서 언급되고 조명 받는 선언서는 3.1독립선언서이다. 그런데 이것 말고도 우리가 기억해야할 세 개의 선언서가 더 있다.
첫째, 무오(戊午)독립선언서. 1918년(무오년) 11월(음력)에 만주 길림에서 만주, 노령을 중심으로 해외에 나가 있던 독립지사 39명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양력 1919년 2월 1일). 무오독립선언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서이며, 한일강제병탄의 무효를 선포하고 무력적 대항을 선언했다. 그 선언서의 대표자로는 해외의 저명인사가 거의 망라되었다. 작성자는 조소앙이다.
▲ 최초의 독립선언서, 무오독립선언서
둘째, 조선청년독립선언서 또는 2.8독립선언서.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유학생대회를 열어 일제침략행위를 설명하고 조선의 독립을 주장한 독립선언서이다. 작성자는 이광수이다. 무오독립선언서의 작성자 조소앙이 동경을 비밀리에 찾아와 무오독립선언의 사실과 내용을 유학생들에게 알려주어 운동을 촉발시켰다. 이 선언서는 최남선이 '3·1 독립선언서'를 기초할 때 참고로 하였고, 국내의 민족지도자들과 학생들에게 널리 알려져 3·1 운동의 발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 2.8 독립선언서(조선청년 독립선언서)
셋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3·1 독립선언서. 1919년 3ㆍ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글로, '기미(己未)독립선언서'라고도 한다. 독립의 당위성을 밝히고 독립국으로서의 조선, 자주민으로서의 조선인을 선언했다. 최남선이 썼다. 1919년 2월 말 2만 1000장을 인쇄, 전국에 배포하였다. 3월1일에는 서울 인사동 태화관(泰和館)에서 민족대표 33인이 선언식을 가졌고, 파고다공원에서도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선언식을 펼쳤다.
▲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3.1독립선언서(기미년 독립선언서)
넷째, 조선혁명선언. 신채호가 1923년 1월 의열단(義烈團)의 독립운동이념과 방략을 이론화해 천명한 선언서이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吉林省)에서 김원봉(金元鳳) 등 한국독립운동자 13명으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로서 암살·파괴·폭동 등 폭력을 중요한 운동방략으로 채택하였다. 1920년부터 큰 성과를 보이기 시작한 의열단이 독립운동의 이념 및 방략을 정립하기 위해 신채호에게 선언서 작성을 요청했다. 선언서는 평화적 독립운동의 한계를 지적하고 민중의 직접적 폭력혁명을 통한 민족독립을 주장하였다. 구체적으로 다섯 가지 공격대상(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및 기타 왜적의 중요 기관)과 일곱 가지 암살대상(조선총독과 고관, 일본군부 수뇌, 대만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밀정, 반민족적 토호열신)을 적시했다.
▲ 신채호와 조석혁명선언
네 가지 선언서를 각기 작성한 네 사람의 행적은 그 시대 조선의 대표적 지성의 극명하게 대비되는 인생행로를 보여준다.
조소앙(趙素昻, 1897~1958). 우리고장 파주 출신이다. 1902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같은 해 이하영(李夏榮) 등의 매국음모를 막기 위하여 성균관에서 신채호 등과 성토문을 만들어 항의하였다. 1913년 중국에 망명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민주공화제헌법의 기초를 비롯한 임시정부의 국체와 정체의 이론정립 및 임시정부의 대외홍보 전반에 걸쳐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으로서 삼균주의(三均主義)-정치·경제·교육의 균등-를 주장하였는데 임시정부는 1934년에 삼균주의를 국시로 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강령’을 채택하였다. 1950년 5·30총선 때에 서울 성북구에서 출마하여 전국최고득표자로서 제2대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6·25때 납북되었다. 1958년 9월 10일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1970년대 말 평양시 신미리에 있는 애국열사릉에 이장됐다.
이광수(李光洙, 1892~1950). 장편소설「무정」(1917년)에서 「흙」(1932년)에 이르기까지 우리 현대문학사에 이정표가 될 만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으나 그의 친일행적은 모든 문학적 업적을 무색하게 만든다.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한 뒤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료편찬위원회 주임과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이 되었다. 1921년 3월 상하이에서 귀국한 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으나 곧 불기소 처분되었다. 그 후 그는 동아일보 기자와 편집국장,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내며 적극적이며 활발한 친일(문필)활동을 벌였다. (1938년 11월에는 공개적으로 사상전향을 선언했고 1940년에는 총독부 정책에 주도적으로 순응하여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창씨개명하였다.) 해방 후 1949년 2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3월 병보석 되었고, 8월 불기소 처분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7월 납북되었다가 10월 25일 사망하였다. 그는 납북 길에 젊은 시절 앓았던 폐병이 재발하였으나 아무런 의료적 조치도 받지 못한 체 처량하게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최남선(崔南善, 1890~1957). 최초의 근대적 잡지 『소년(少年)』(1908년)을 창간하였고, 『시대일보』(1924년)를 창간하였고, 조선 고전의 보급을 주도하였고, 조선어사전 편찬도 시도하는 등 근대 학문정립에 적지 않은 공적을 남겼다. 기미독립선언으로 체포되어 2년 8개월간 복역하기도 하였다. 1928년 조선사편수위원회에 참여한 이후로 학술계의 친일운동을 주도하였다. 1935년부터 한국과 일본 사이의 ‘문화동원론(文化同源論)’을 주장하면서 일본 신도(神道)의 보급에 참여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후 만주로 건너가 1939년부터 만주국 건국대학(建國大學) 교수로 취임하여 한일의 역사가 하나의 뿌리임을 주장하는 역사연구에 몰두하였고 이후 수많은 친일 저작과 논문을 발표했다. 광복 후 1949년 2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곧 보석으로 풀려났다. 휴전 후 서울시사편찬위원회 고문을 맡으며, 언론을 통해 기고활동 지속하였다. 1957년 10월 10일 사망하였다.
신채호(申采浩, 1880~1936). 그는 뛰어난 유학자이자 역사가로서 많은 저작을 남겼다. 단군·부여·고구려 중심의 주체적인 민족주의사관을 주창한 기념비적 역사서와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위인들의 전기를 다수 발표하였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한 후 블라디보스트크와 만주 일대에서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무장투쟁을 중시하여 임시정부와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 1928년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대만에서 외국위체(外國爲替)위조사건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었다. 1930년 5월 대련(大連)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旅順)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뇌일혈로 1936년 옥사했다. 아내와 두 아들이 그의 시신을 화장한 후 유골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묘를 썼다(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우리 현대사에서 극히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네 가지 선언서를 쓴 네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이나 변절한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더욱이나 그 중 한사람은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의 발행인 겸 편집책임자이자 사료편찬위원 책임자였으니...... 또한 독립된 뒤에도 이들이 처벌받지 않은 황당한 역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1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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