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 [99] 라면의 정치경제사
수정 : 2019-05-10 10:29:37
라면의 정치경제사
박종일 (지혜의 숲 권독사)
많은 나라의 국민식품이 그러하듯이 라면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라 문화적 상징이자 정치경제사적 배경을 지닌 음식이다. 라면은 중국이 원산지이며 일본으로 전래된 후 일본 특유의 장인정신과 효율성이 더해지면서 마침내는 전 세계의 음식문화를 바꾸어 놓았다. 라면은 블루 칼러들이 간편하게 배를 채우는 전형적인 음식이자 도시 소자본 심야식당의 중심 식단이 되었다. 라면은 세계화 바람을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일본 미식의 상징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밀이 쌀을 대체함으로써 일본의 전통적 (쌀)식품 가공기술이 퇴화하는 부작용도 가져왔다.
라면의 이름은 원산지 중국에서는 라미엔(拉麵납면, 손으로 늘려 뽑은 국수란 뜻)이지만 일본식 한자발음인 라멘으로 일본에 뿌리를 내렸고 한국에 들어오면서 라면으로 변했다. 라면이 일본의 거리에 등장한 것은 1880년대의 일이었고 일본의 상징으로서 전세계를 풍미하게 된 것은 20세기 후반의 일이다. 1880년대에 중국노동자들이 요코하마에 차이나타운을 형성했다. 1920년대가 되자 일본의 음식점들이 중국인 요리사를 고용하기 시작하면서 라면도 일본의 대중시장에 등장했다. 이 때 라면은 “중화소바면” 또는 “지나(支那)소바면”으로 불렸다. “지나”라는 이름에서 당시 점차 기세를 높여가던 일본제국주의의 의식 상태를 엿볼 수 있다(지나는 일본인이 중국을 낮추어 부르는 이름이고 소바는 메밀로 만든 일본 국수이다). 1940년대가 시작되면서 일본에서는 전시체제 하에서 주식량인 쌀의 부족사태가 벌어졌고 각종 밀가루 가공식품이 유행했다. 라면은 빵과 비스킷과 함께 전시 절약경제의 상징이 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난 뒤에도 쌀 부족 사태는 개선되지 않았다. 이 시기 일본은 유럽과 마찬가지로 미국이 대량으로 원조한 밀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식량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전후에 일본은 급속한 2차공업화를 맞았고 더불어 건설업이 크게 일어났다. 라면은 짧은 시간 안에 에너지를 보충할 수 있는 임금식량이 되어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이 시기에 라면의 머리 위에 붙어있던 “지나”라는 제국주의적 부호가 떨어져 나갔다.
1958년에 일본에서 일청(日淸)식품회사란 기업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양의 포장된 라면을 공업적으로 대량생산하기 시작했다. 이 회사의 설립자이자 라면의 공업적 생산기술을 발명한 안도모모후쿠(安藤百福, 본명은 오백복吳百福, 1910~2007)는 타이완에서 태어나 일본에 정착하고 귀화한 화교이다. 일청식품회사는 1963년에 한국의 삼양식품과, 1968년에는 타이완의 국제식품공사와 합작하였다. 라면의 공업적 제조기술의 특허권을 갖고 있던 안도모모후쿠는 1964년에 특허권의 사용을 무상으로 개방하였다. “값싸고 품질 좋은 라면을 서민에게 제공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공업적 라면 생산자 안도 모모호쿠
1963년 한국에서 1호 라면이 출시되었을 때 가격은 100g 포장 하나에 10원이었는데 당시 커피 한 잔에 35원이었음을 감안하면 높은 가격이 아니었으나 시장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밥과 국에 익숙한 사람들로서는 라면을 한 끼 식사로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더욱이나 인스턴트 식품은 생소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식량자급을 국가적 과제로 설정한 박정희 정권이 1965년에 혼분식 장려 정책을 시작하자 라면은 대중적인 식품으로 자리잡아갔다. 현재 라면을 가장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나라는 중국이지만 시민 1인당 라면 소비량이 가장 많은 나라는 한국이다.
▲적군파 사건 당시 컵라면 먹는 경찰들
일청식품회사는 라면의 포장기법에서도 많은 기술적 진보를 보여주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1971년에 나온 컵라면이다. 1971년에는 일본의 급진적 학생운동 집단인 적군파(赤軍派)가 후지산에서 합숙훈련을 하던 중 조직을 이탈하려는 동료들을 살해한 사건이 터졌다. 이때 적군파가 점거하고 있던 산장을 경찰이 진입하여 진압했다. 경찰의 동향을 현장 중개하던 티브이 방송에 컵라면으로 요기하는 경찰의 모습이 비쳤다. 이때부터 컵라면의 판매량은 급격하게 늘었다. 1980년대에 세계화의 바람이 불었다. 맥도날드, 데니스 등 미국의 페스트푸드 음식점이 세계로 미국의 맛을 퍼뜨렸다. 라면도 세계 곳곳에 일본문화의 낙인을 찍어나갔다. 이 시기에 일본은 세계가 주목하는 경제적 기적을 보여주었고 일본인은 일본식 창의력과 효율성의 상징으로서 라면을 내세웠다. 이런 바탕 위에서 이 시기에 일본에서는 민족주의가 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1995년에는 3,400만 달러를 들여 요코하마에 라면박물관이 세워졌다.
2000년에 일본의 한 여론조사기관이 일본의 보통시민들을 대상으로 20세기에 일본에서 나온 가장 중요한 발명품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결과는 라면이 1위, 카라오케 기기가 그 다음이었다. 그런데 현재 가장 많은 종류의 라면을 생산하는 나라는 한국이다. 카라오케 기기를 활용한 노래방 사업이 가장 활발한 나라는 모르긴 해도 한국이 아닌가 싶다. 이건 어떤 의미일까?
#100호
신문협동조합「파주에서」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