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 [97] 혁명가 김구의 사랑
수정 : 2019-05-10 10:31:23
이해와 오해 [97]
혁명가 김구의 사랑
박종일
1932년 4월19일, 상해 홍구(虹口, 지금은 노신魯迅)공원에서 열린 일본군의 승전기념식이자 천황생일 기념식장에서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져 일본 군·관계의 요인들을 폭살하였다. 중국주둔 일본군 최고 사령관 시라가와 대장이 이때 폭사했고, 이 사건이 중국의 조야에 던진 충격은 엄청났다. 이보다 석 달 전인 1932년 1월 8일에는 이봉창 의사가 일본 동경에서 천황의 행차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로 그친 사건이 있었다. 두 사건은 일본으로서는 참기 어려운 치욕이었다. 두 사건의 주모자인 백범 김구 선생을 붙잡기 위해 일본정부 외무성과 조선총독부와 상해주둔 일본군사령부가 합동으로 60만 위안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당시 우리 임시정부가 세 들어 살던 건물의 월세가 300위안이었음에 비추어보면 현상금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여담이지만 임시정부는 월세를 제때에 내지 못하고 미루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고 한다). 일본군 당국이 상해에 거주하는 무고한 한인 교민들을 마구 잡아들이자 백범은 배후 인물이 자신임을 알리는 공개서한을 언론을 통해 발표하고, 지인들의 도움과 국민당 정부의 적극적인 비호 아래 피신생활에 들어간다.
사건 직후 백범은 미국인 신부 피치(G. A. Fitch)의 집에 숨었다가 언론보도 이후 일본 군경의 수색이 심해지자 중국인 친구 저보성(褚輔成)의 도움을 받아 1932년 초여름 비밀리에 절강성 가흥(嘉興)과 해염(海鹽)으로 가서 반년동안의 피난생활에 들어간다. 백범의 신변보호는 국민당 최고 당국자들이 직접 관심을 가지는 문제가 되었다. 당시 국민당 중앙조직부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독립운동가 박정일(朴精一)이 조직부장 진과부(陳果夫)에게 백범의 신변안전에 관해 도움을 요청했고, 진과부는 장개석(蔣介石)에게 보고한 후 자신의 심복인 초쟁(肖錚)을 가흥으로 급파했다. 초쟁은 절강지역에서 오랫동안 일한 경력이 있어 가흥의 유력인사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초쟁은 저보성1)의 비서로 일한 적이 있는 강일천(江一天) 여사를 통해 저씨 집안에서 백범을 보호해주도록 주선해달라고 요청했다.
백범이 품고 온 한 장의 낡은 사진. 스물 몇 살의 주애보
가흥에서 백범은 장진구(張震球), 또는 장진(張震)이란 가명을 사용하며 광동에서 온 골동품 상인으로 위장한 채 저보성이 제공한 가옥에서 은거했다. 『백범일지(白凡逸志)』에서 백범은 가흥에 관한 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가흥에는 산은 없으나 호수는 낙지발 같이 사통팔달하여 7~8세의 어린아이라도 다 노를 저을 줄 아는 모양이더라. 토지는 극히 비옥하여 각종 물산이 풍부하고 인심과 풍속이 상해와는 딴 세상이다. 상점에 에누리가 없고 고객이 무슨 물건을 잊어버리고 상점에 두고 갔다가 며칠 후에라도 찾으면 잘 보관하였다가 공손히 내어주는 희귀한 미풍을 갖고 있더라.”
상해에서 백범의 흔적이 사라지자 일본 군경은 호항선(滬杭線, 상해-항주간 철로)과 경호선(京滬線, 남경-상해간 철로) 연변을 정탐하기 시작했다. 저씨 집안에서는 이런 동향을 눈치 채고 백범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저보성의 큰며느리 주가예(朱佳蕊)는 가흥 근처 해염이 친정동네였고 주씨 집안은 그 지역의 호족이었다. 주가예의 제안에 따라 백범은 해염의 남북호(南北湖) 근처로 긴급히 옮겨졌다. 주씨 집안은 남북호 호반에 ‘재청별장(載靑別墅)’이란 매우 아름다운 전통양식의 별장을 갖고 있었다. 그곳은 풍광도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찾는 이가 없어 신변안전에도 안심할 수 있는 곳이었다. 주가예는 한여름 찌는 더위에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자신의 6개월 된 아이까지 버려두고 온갖 일용품을 마련하여 백범을 해염까지 호송했다. 그 광경을 『백범일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저씨 부인(주가예)이 칠팔월 염천에 친정 하녀 한 명에게 나의 식료와 각종 육류를 들려가지고 손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산 고개를 넘는 것을 보고.....우리 국가가 독립이 된다면 저씨 부인의 용감함과 친절을 우리 자손이나 동포가 누가 흠앙(欽仰)치 않으랴. 활동사진으로는 찍어두지를 못하나 문자라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이글을 쓴다.”
백범이 피신해있던 가흥 해염의 수상배. 상단은 백범의 글씨이다.
가흥에서 백범은 잊을 수 없는 처녀 뱃사공 주애보(朱愛寶)를 만난다. 주보애는 백범의 피난시절의 충실한 반려였다. 그는 백범에 관해서는 광동사람이란 것 말고는 아는 것이 없었으나 백범을 헌신적으로 보살피고 도왔다. 백범의 신변안전을 위해 주애보는 매일 배를 저어 백범을 모시고 운하와 호수사이를 돌아다녔다. 다시 『백범일지』는 이 시절의 사정을 기록하여 “낮에는 주애보의 작은 배를 타고 인근 운하로 각 농촌을 구경하는 것이 유일한 임무인 듯하다”고 하였다. 이런 백범의 상황을 살핀 주가예의 남편(저보성의 큰아들)이 백범에게 이런 권고를 한다. “김선생의 피신 방법은, 홀아비로 사시니 나의 친우 가운데 과부로서 나이 30 가까운 중학교선생이 있으니, 보시고 합의하시면 처로 들이시면 어떨까 합니다.” 백범은 이렇게 답한다. “중학교원으로는 즉각 나의 비밀이 탄로되리니 불가하다.” 이어서 백범은 “차라리 요선녀(搖船女, 여뱃사공)를 가까이 두어 의탁하면, 주녀(朱女, 주애보)가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즉 나의 비밀을 지킬 수 있으리라하고, 그 후로는 아예 배위에서 생활을 계속하였다”고 회상하였다. 여기까지가 백범이 주애보에 관해 남긴 기록의 전부이다. 백범과 주애보가 호수와 운하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사이에 두 사람 사이에는 부부와 비슷한 감정이 생겼다(백범의 부인은 1924년에 폐병으로 사망했다. 가흥에 갔을 때 백범의 나이는 56세였다). 이후 5년 동안 주애보는 줄곧 ‘광동에서 온 골동품상인 장진구’를 곁에서 모셨다. 중·일전쟁(1937~1945년)이 폭발하자 백범은 임시정부를 이끌고 중경으로 옮겨가고 주애보도 고향 가흥으로 돌아갔다. 백범은 주애보를 다시 만날 수 있다고 굳게 믿었지만 소용돌이치는 역사는 두 사람이 다시 만날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한중수교가 이루어진 뒤 백범의 아들 김신(金信)2) 이 여러 차례 가흥을 찾아와 주애보 노인과 그 후손들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끝내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1996년 9월 30일, 한국정부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백범을 보호한 저보성과 그 가족들의 공적을 평가하여 저씨 집안의 후손 저계원(褚啓元)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지금까지 백범에 관해서는 주로 강인한 혁명전사로서의 행적과 이미지가 우리에게 알려져 있었다. 근래에 중국에서의 한국의 독립운동에 관한 중국 학계의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백범의 ‘사랑얘기’도 알려지고, 백범이 가흥으로 가게 된 경위도 자세하게 밝혀졌다.
#96
1) 저보성((1873~1948), 절강성 가흥인. 신해혁명에 참가하여 봉기를 지도했고 군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민정장(民政長)을 역임했다. 1927년에는 절강성 정부위원 겸 민정청장을 맡았다. 중일전쟁 시기에는 전면적인 대일 항전을 주장했다.
2) 김신(1922~2016). 대한민국 6대 공군참모총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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