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개설화전을 보고와서. - 묵이 천하를 변하게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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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개설화전을 보고와서.
묵이 천하를 변하게 할 수 있을까?
유쾌한 한마당이었다. 시와 서, 설(說)과 창(唱) 그리고 열(熱)과 소(笑)가 가득한 공간이었다. 무엇보다 마음이 풍성한 것은 묵개의 품격과 관객의 열기가 평형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최근 모임에서 유쾌함이나 풍요로움을 느낀적이 있었던가. 소란스럽기 짝이 없고 일방적 주장이나 강요된 웃음으로 주최측 이외에는 불편하기 그지없던 기억뿐이다. 묵개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특별한 마력을 지닌것 같다. 앉아서 몇마디 건넬 시간만 주어지면 상대는 스스로 경계를 무너뜨리고 묵개와 친구가 된다. 얼마나 신비하고 대단한 일인가.
오늘 묵개의 설화전은 시와 글씨를 보는 것보다 자발적으로 몰려든 묵개의 사람 말하자면 붕우의 됨됨이를 보는것이 더욱 값졌다. 파주 출판단지라는 외딴지역에 봄을 맞는 토요일 오후는 가급적 안와도 좋다라는 시공간의 선택이다. 그런데 꾸역꾸역 바둑판을 메우듯 어디에선가 기쁜 얼굴로 찾아들었다. 천리길이든 오백리길이든 한적한 이곳을 멀다않고 달려왔다. 더욱 놀랄 일은 젊은 삼심대부터 칠십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사실이다. 쏠림현상이 해소된 화(和)의 공간. 묵개가 자주 말하던 연화장세계가 이것이던가.
묵개가 소개하는 사람의 반정도는 나도 얼굴 정도 안다. 그만큼 터놓고 지낸다. 한사람한사람 인연의 계기는 대수롭지 않지만 결과는 놀랍다. 인연의 깊이는 시간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울림에 비례함을 알게된다. 개별적 사연과 스토리로 들어가면 묵개는 누구에게나 감동과 희망을 준다. 사람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이 없다. 기존질서에 순응치 않는다. 신분이나 나이를 따지지도 않는다. 말(末)을 보면 본을(本)을 알고 종(終)을 보면 시(始)를 안다. 사사로움이나 실리를 취하지 않는 비범한 친화력에서 탈속의 인품을 느낀다. 물질세계와 경쟁시스템에서 한참 벗어난 인물이라는 점에서 경계의 대상이 될수 없다. 본심이 선한 인물이라면 묵개를 싫어할 까닭이 있겠는가.
그래도 사람의 인연은 까닭없이 깨지는 법. 싫은것은 싫은 것이다. 요즘 용어로 코드가 맞지 않으면 친구가 될수 없다. 묵개의 마법은 친구처럼 친근하면서도 스스로 존경심을 갖도록 하는데 있다. 어른도 선생도 없는 요즘 세태에서 거의 기적같은 일이다. 물론 인위적인 의도로 그렇게 하기는 불가능하다. 사람은 누구나 상대의 깊은 마음속을 뚫어보는 신통력을 가지고 있다. 막현호은 막현호미(莫見乎隱 莫顯乎微)는 군자에게만 해당하는건 아니다. 신독이 통하고 진실이 힘을 얻는다. 그럴수록 신분과 세대를 아우르는 묵개의 친화력은 어디에서 나올까 궁금해진다.
묵개는 호다. 이름은 서상욱. 이름보다 호가 월등하다. 이름은 자기의지가 없지만 호는 기질과 의지가 반영된다. 묵개. 보고 들을수록 그럴듯하다. 나는 묵개라는 호속에 친화력의 힘이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논어에서 <묵이지지 학이불염 회이불권>이라고 했다. 묵은 마음속이다.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일종의 도광양회다. 속으로 숙성하고 실력을 숨긴다. 아니 드러낸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잠겨있는것이 더욱 크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미 보고 있다. 드러난 것을 보고 드러나지 않은 것을 존경한다. 그릇의 크기로 간주한다.
더구나 묵개는 학이불염의 단계를 거쳤다. 일만권의 독서. 젊은날의 만행. 모든 것이 배울 학자에 포함된다. 지식과 경험.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의 고비를 넘겼다. 실천적 경험론과 관념적 사고를 아우르고 서양의 그릇과 동양의 내용을 뚫어본다. 마지막 단계 회이불권. 가르치되 게으르지 않는다. 요즘 열심히 주위를 가르치려고 하고 있다. 관인학사도 만들고 인사포럼도 참여한다. 유튜브 강의도 시작했다. 아직 대중성이 떨어지지만 서둘 생각은 없는듯 하다. 호수에 던진 돌의 파장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동심원의 지름을 넓혀가는걸 아는 까닭이다.
삼월에 파주 김영사에서 열리고 있는 설화전도 그렇다. 묵의 드러남이다. 맘이 배죽하게 표현된것이 시(詩)고 서(書)고 화(畵)다. 얼마전 부채전시회를 한적도 있지만 사실상 데뷰전이다. 공간이 비좁긴 하지만 글씨만 봐도 내용을 짐작할수 있다. 힘이 솟는 글씨, 극도로 절제한 구절, 향기가 나는 붓놀림의 오묘함, 학이 춤을 추고 용이 비등하듯 작품은 제각각 개성을 지니고 있다. 지극함이 드러나면 빛나게 되고 빛이나면 감동을 주고 감동을 주면 변화가 된다고 했다.(誠則形 形則著 著則明 明則動 動則變 變則化) 묵이 천하를 변하게 하고 화하게 할수 있을까. 이제 시작이라고 본다. 묵은 묵일때 신비함과 마력을 가질수 있다. 과하면 탈이 난다. 조급할 필요는 없다. 묵묵히 회이불권하면 천하는 변화하리라 본다. 인연이 계속 몰려든다는 의미는 희망적이다. 마음이 허할수록 말이 많은 시대일수록 묵개는 빛을 발할 것이다.
설화전. 말씀설자. 이 글자를 사용한 의미를 묵개는 말했다. 말이 힘을 얻으면 설득할 세가 되고, 세가 달성하면 기쁠열이 되고, 기쁨이 더 커지면 벗어날 탈이 된다. 글자의 진화는 이토록 철학적이고 민중적이다. 한계를 넘을때의 새로운 세계 그러나 과한 것에 대한 경계. 에드워드 박은 묵개의 시서는 사람에 따라 체가 달라지고 때에 따라 기운이 다르다고 했다. 시중을 이름이다. 건대 김기덕교수는 미생의 완생을 부르짖으며 건배했다. 그만큼 모든이가 세상에 대한 원과 갈증을 풀어줄 개벽을 바란다는 뜻일게다. 노은주명창의 박타령처럼 일확천금에 대한 속물근성을 은근하게 대변해주는 시원함도 잊지 않았다. 행사를 주관한 이윤경대표와의 인연을 소개하며 '경국지색'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묵개의 인간적 매력과 유머가 어쩌면 이 자리를 만들었다는 생각도 해본다.
글 고성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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