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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태표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개성공단 이야기 ②

입력 : 2016-03-18 13: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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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근로자들의 ‘공동생활구역’

 

한국전력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북측 여직원. 

 

 공단출근 3개월이면 얼굴 색깔이 바뀌어.

 

 홍태표 할아버지의 표현은 하나도 과장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백프로 몸빼를 입고, 검정이나 회색의 밋밋한 옷들에다 의사들 마저 일하러 오던 개성공단은 점차 변하였다. 각양 각색의 색깔 옷을 입고, 처음에는 새까맣던 여자들의 피부도 살이 오르면서 하얗게 변했다했다.

“개성공단 10년 사이에 가장 많이 변한 것을 꼽는다면 무엇인가요?”

“옷이지. 처음엔 몽땅 몸빼였는데, 색깔도 다양해지고...”

 

 개성공단에 입주한 파주 기업중 하나인 피식스 정진석 사장은 개성공단 여성근로자들이 옷만 화려해진 것이 아니라 미에도 관심이 높아져서 쌍거풀 수술을 많이 한다고 했다. 그만큼 개성공단 여성들이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 아닐까?

 

 홍태표 고문도 동의한다.

“눈썹 문신하고 쌍거풀 수술을 많이 해. 공단에 출근하잖아. 3개월만 지나면 얼굴 색깔이 바꿔. 시내에서 공단 사람과 아닌 사람이 구분되지.”

“남자들도 바뀌나요?”

“남자들은 피부만 바뀌는 거지 뭐.”

 

 서울대 통일평화 연구원의 통일학 연구 보고서인 [공간평화의 기획과 한반도형 통일프로젝트 개성공단](진인진, 2015년)에는 개성공단 북한 근로자들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개성공단에서의 노동생활은 북한 근로자들의 생활양식을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다. 처음 공장에 일하러 온 북한 근로자들은 자본주의적 물질세계에 대해 전혀 경험한 바 없었다. 행색은 초라하고, 얼굴을 새까맣게 검었다. 그러나 수개월이 지나자 그들의 얼굴은 뽀얗게 살이 올랐고, 근무 시작전에는 반드시 남한의 인스턴트 커피를 마셔야하고, 초코파이와 라면의 맛에 길들여졌다.’ (진인진, 2015년)

 

 치약과 비누가 사치품이라고 못 나눠줬어.

“맨 처음 갔을 때는 냄새 때문에 고생했어. 50명을 한 방에 넣고 조사하고 그러는데...맨 처음 들어간 사람들은 거기서 냄새 때문에 죽는 줄 알았잖아. 세탁도 안하고 씻지도 않으니 뭐라 말할 수 없는 냄새가 나는거야.”

그래서 홍태표 할아버지는 남쪽 본사에 연락을 했다. 개성에 공장을 짓기로 결정한 이후 SJ테크 공장 안에 박스가 등장했다. 북한 사람들 돕자고 월급날 1,000원씩 넣어 모으고 있었는데, 그 돈으로 치약 칫솔 비누를 사서 보내라고.

“그걸 공장에 갖고 왔는데...1주일이 지나도 주지 못하는 거야. 사치품이라고 못나눠준다고 하더라고. 끝까지 못 나눠줬어. 어쩔 수 없이 우리 회사 공중화장실에 갖다 놓고 쓰게 했지. 결국 나눠주지 못했어.”

 

샤워실을 공장마다 짓도록

할아버지는 고민하다가 한참 후에, 빨래비누와 휴지 2개를 집에 가서 쓰라고 매달 나눠줬다. 이것은 사치품이 아니니 받아갔다고 했다. 회사에 세탁기도 놓고, 샤워실을 만들어주고, 1주일에 한 번씩 샤워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세탁해주고 샤워시키는 것은 내가 해놓은 거야. 샤워실 크게 만들어놨어. 내가 공단 이곳 저곳을 댕기면서 하라고 했지.”

 

 할아버지는 ‘잘사는 100명인 윗사람들(지배세력들) 빼고는 북한 사람들에게 잘해줘야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개성공단의 휴머니스트. 황해도가 고향인 할아버지는 개성공단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그리고 북한 사람들이 어른에게 공손한 예의가 있어서 자신에 대해 터치를 하지 않아, 북한 근로자들이 밥 먹는 식당에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그러니 이곳 저곳 해결사 노릇을 많이 했다.

 

 “북쪽 사람들이 우리 남쪽 사무실 관리위원회 변소를 보더니 깜짝 놀라는 거야. 그 표정이 잊혀지지가 않아. 그걸 보고 생각했어. 우연이라도 남측 사무실에 들어와서 보고 느끼라고 무엇이든 최고급으로 설비하라고 했지. 입주기업들에게도 건물이나 설비를 최고급으로 하시오라고 요청하고다녔어.” 할아버지는 이런 작은 권유와 노력으로 변화를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개성공단은 사람간의 통합, 사회통합을 만들어가는 곳

2005년 개성공단이 조업을 시작할 때 13개업체에 6,013명이 근무를 했는데, 2013년에는 123개 업체 52,329명이 근무하고, 남쪽 근로자들는 1,000명을 넘기도 했다. 이 공간에서 10년간 일어난 변화들은 작지 않다. 적어도 홍태표고문과 같은 실향민 할아버지가 북한정권에 대해서 극도의 혐오를 보이면서도, 서로 몰라서 소통이 안되었고, 오래 설득하면 다 통한는 것이라며, 휴머니즘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개성공단 같은 거 여러 개 만들어야지. 통일을 하는데 큰 완충제 역할을 하는거야.”

 

 지금도 북한 윗대가리들 때문에 개성공단이 문을 닫게 되었다고 통탄을 하면서도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개성공단 10년이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하고, 부대끼며 소통했던 공감대를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할아버지의 살아있는 경험을 들어서인지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박사들이 쓴 이 책이 무겁지 않게 느껴졌다.

 

 ‘통일은 제도적, 정치경제적 통합의 과정을 수반하지만, 독일 통일의 선례에서도 나타나듯이 무엇보다도 사람간의 통합, 즉 사회통합이 오랫동안 난제로 남는다. 흔히 개성공단을 통일의 시험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개성공단은 일차적으로 남북한 간의 경제공동체 형성을 위한 시범사업이기도 하지만, 다른 차원에서 보면 수십년 동안 이질적인 사회문화적 양식과 규범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만나서 한 공간에서 일상을 보냄으로써 사회문화적 공동체를 형성해나가는 기회이기도 하다.’([개성공단], 진인진, 2015년, 237쪽)

다음 호에 계속

 


  

홍태표 할아버지

 

글 임현주 기자

 

 

 

#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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