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 ㊹ 함석헌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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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선생님
나라라는 공동체가 어떤 곤경에 처하거나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때로는 지혜로, 때로는 매서운 질책으로 길을 보여주는 어른이 계셨던 시절이 있었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에 걸쳐 20대 청년기를 지내온 나의 세대에게 그런 어른 가운데 한 분이 함석헌(1901~1989) 선생이셨다. 많은 지식인이 5.16 쿠데타 세력에게 아유할 때 선생께서는 그 집단을 냉엄하게 꾸짖는 글을 쓰셨다. 아래에 인용한다.
“우리의 흠은 잊기를 잘하는데 있습니다.....우리는 문제가 일어날 때는 재빨리 깨닫는 것 같아도 얼마 못가서 잊어버립니다. 자유당 일도 분개할 때는 하다가도 지나가면 잊어버렸고 민주당도 그랬습니다. 한일조약도 잘못된 줄은 알아 떠들었으나 지나간 다음에는 잊어버렸고, 나라재산 부정매매도, 밀수사건도, 있을 때는 분개했어도 곧 잊어버렸습니다. 신문도 한두 번 때린 다음에 나 할 일 다 했다는 듯 잠잠합니다. 빚은 받을 때까지 독촉해야하고 잘못하는 머슴은 고칠 때까지 책망하기를 그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정성입니다. 확실히 우리의 잘못은 옅고 끈기 없는 데 있습니다.
역사가 무엇입니까. 기억입니다. 지나간 것을 잊어버린다면 역사는 없습니다. 정신이란 무엇입니까. 시간을 꿰뚫어 버티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억 없이는 아니 됩니다. 지나간 잘못을 잊지 않아야만 새 잘못을 아니 할 수 있고, 한번 잘한 것을 놓지 않고 지켜야만 국민성격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한 줌 되는 군인이 일어나 하룻밤 사이에 전통으로 내려오는 모든 것을 때려 부수고 세대교체를 하겠다, 민족개조를 하겠다, 건방진 수작을 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성격이 없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일본시대에 당했던 부끄럼과 업신여김을 잊지 않았다면 한일조약이 그렇게 되고 월남참전이 저렇게 되었을 리는 없습니다. 영악해야만 역사적인 국민이 됩니다. 5.16은 그 부족한 성격 때문에 맞은 역사적 재앙일 뿐입니다.(1968에 저술, 『함석헌 저작집』 제5권 221~222쪽, 한길사 간)”
반세기 전에 선생께서 쓰신 이 글이 지금도 유효하게 느껴지는 것은 기쁜 일일까? 잊지 않도록 기록해야 할 자들이 오히려 어떤 때는 노골적으로 잊으라고 강요하고 어떤 때는 교묘하게 잊기를 부추긴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어느 날 아침에 가만히 있다가 물귀신이 된 수백 명의 어린 영혼들, ‘정의의 구현’을 외고 다니든 판검사들이 퇴직 후 단 몇 년 사이에 전화 몇 통화로 100억대의 알돈을 버는 요술이 통하는 나라, 식민지 성노예의 역사를 헐값에 ‘불가역적’으로 해결하는 무지막지하게 과감한 대통령, 온 나라의 강줄기를 나랏돈 들여 마음대로 파헤치는 파렴치함.....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피곤해도 기억하자, 우리가 영악하지 못해서 역사는 지금도 되풀이 되고 있지 않은가.
글 박종일(지혜의 숲 권독사)
#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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