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 [57] 우리나라의 성씨(姓氏)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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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성씨(姓氏)제도
우리나라의 성씨제도는 매우 복잡하다. 성씨가 사용된 시기는 삼국 이전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중국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한 6,7세기쯤부터라고 할 수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함으로써 고구려와 백제계의 성씨는 계승되지 못했고, 후삼국시대에는 지방 호족들에 의해 신라계 성씨를 중심으로 중국식 성씨가 활발하게 보급되었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은 각지의 호족들에게 지역을 근거로 한 성씨를 나누어 줌으로써 성과 본관을 토대로 하는 성씨제도가 정착되었다. 본관이란 성이 기반하고 있는 지역을 말한다.
조선 초기 지방행정 단위가 대대적으로 개편되었다. 이에 따라 지역을 세분하여 다양하게 존재하든 본관도 15세기 후반부터는 점차 주읍(主邑: 지방 수령이 주재하는 곳) 중심으로 통합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본관을 달리하던 동일 성씨가 같은 본관을 쓰게 되는 경우가 생겨났다. 이들 동성은 혈연관계가 없었지만 점차 동본으로 취급되었다.
본관이 바뀌는 계기는 행정구역의 개편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문벌의식이 고조되면서 저명한 조상이 없는 가문에서는 기성의 명문거족에 편입되기 위해 자발적이며 적극적으로 본관을 바꾸어 나가기도 했다. 또한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성이 없던 천민층이 양인화함에 따라 성을 갖게 되는 층이 크게 증가했다.
16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성이 없는 사람이 전체 인구의 40%정도였다. 성이 없던 천민층이 점차 성을 갖게 되었음에도 새로운 성씨는 거의 출현하지 않았다. 새로 성을 갖게 된 사람들이 기존의 유명 성씨를 선택함으로써 도리어 지역적 연관성이 없는 본관의 성씨가 전국적으로 산재하게 되었다.
천민들의 후손은 오늘날 이들 유명 성씨의 족보에 등재되어 있을 것이다. 결국 40% 정도의 사람들이 혈연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성씨의 족보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셈이다.
새로 성을 가지게 된 이들은 호적상으로 각기 그들의 거주지에 편호됨으로써 거주지가 곧 본관이 되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새로운 본관이 대거 나타나기도 하였지만 이들은 점차 유명 본관으로 본관을 바꾸어 버림으로써 기존의 성씨에 자연스럽게 편입되었다.
조선 초기에 4,500개가 넘던 성관(姓貫)이 오늘날에는 오히려 3,400여 개로 줄어든 사실이 이런 사정을 반영한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상민에게는 경제적 부담이 가중되었다. 다산 선생은 상민들이 군역을 면하기 위해 족보를 위조하는 세태를 지적하였다.
양반에도 격이 있었다. 양반은 더 높은 문벌 가문이 되려고 족보를 위조 했다.
오늘날 성과 족보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족보는 성과 본관의 역사를 담고 있지만 위에서 살펴본 변화의 과정을 사실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최종 결과만을 수록하고 있을 뿐이다. 신분제 사회가 아닌, 개인의 능력이 우선시 되는 사회에서 성씨와 족보의 내력을 신성 불가변의 존재로 받들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족보만 가지고 “뼈대 있는” 집안의 구성원이라고 가벼이 자랑하지도 말 것이며 “뼈대 없는” 집안이라고 기죽을 일도 아니다.
글 박종일(지혜의 숲 권독사)
#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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