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 [59] 진시황 불노초와 ‘한 건 해먹고 튄’ 인물 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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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 불노초와 ‘한 건 해먹고 튄’ 인물 서복
≪일본서기≫는 일본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사이다. 이 책은 일본의 건국신화와 역대 천황들의 사적을 기록하고 있다. 아득한 옛날에 만물은 혼돈에 빠져 있다가 음양이 나뉘면서 하늘과 땅이 나타났다. 그리고 하늘과 땅 사이에 신들이 등장했다. 그 중에서 남녀 한 쌍의 신이 부부가 되었다. 이들 부부 신이 일본열도를 낳고 또 태양(天照大神천조대신)의 신과 달(月讀尊월독존)의 신, 악의 신(素箋鳴尊소전명존)과 불의 신 등 여러 신을 낳았다. 악의 신이 하늘에서 내려와 지상세계를 통치했다. 천조대신이 그의 손자(天孫)에게 3종의 신기(神器)를 전해주면서 일본열도에 내려가 악의 신의 자손을 몰아내고 일본을 통치하라고 명령했다. 천손은 몇대로 이어져 내려갔고 제4대 천손이 바로 신무천황이다. 신무는 45세에 정벌전쟁을 시작했다. 대화(大和) 지방에서 격렬한 싸움을 벌여 토착세력을 제압하고 6년 동안 각 지방 세력을 평정하여 대화정권을 세웠다. 신무는 이렇게 일본을 개국하고 제1대 천황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일본인들은 천황의 혈통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왔다고 믿고 있다.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한 후 장생불노약을 찾으려 했다. 서복(徐福)이란 도사가 동해의 신선들이 사는 삼신산에 그런 약초가 있다는 상주문을 올렸다. 서복은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노초를 찾아 떠났다. 진시황 37년(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죽기 1년 전)에 시황제는 천하를 순시하든 중 낭야(瑯琊, 지금의 산동성 청도 남쪽)에 이르러 서복을 불러 그간의 성과를 물었다. 10여 년 동안 수없이 바다로 나가 엄청난 비용을 소모하고서도 아직 불노초를 구하지 못한 서복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바다에 큰 교어(鮫魚, 고래)가 있어 삼신산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다고 이유를 둘러댔다. 진시황은 직접 고래잡이 선단을 지휘하여 바다로 나갔고, 실제로 고래를 만나고, 잡았다. 서복은 이번에는 바다에서 만난 신선이 불노초를 구하려면 동남동녀와 오곡의 종자를 가져와야 한다고 말했다고 둘러댔다. 진시황은 3천 명의 동남동녀와 각종 기술자, 고래잡이 기구와 전문가를 서복에게 주었다. 서복은 다시 바다로 나갔고 그리고는 돌아오지 않았다(서복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집단탈출 이민을 계획했다).
중국대륙과 대만의 학자들 가운데는 서복이 일본에 도달하여 정착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서복은 지금의 와카야마(和歌山)현 구마노(熊野)의 신궁(新宮)에 상륙했다. 신궁에는 지금까지도 그를 모시는 사당과 그의 묘라는 것이 남아 있다(후세 사람들이 전설에 부회하여 만든 것이겠지만). 서복이 상륙한 구마노는 예부터 일본 고래잡이 어업의 중심지이다. 구마노 고래잡이 어업의 기지 태지정(太地町)은 “진지포(秦地浦)”라고도 하는데 진나라 사람들이 거주한 해안지대란 뜻이다. 이곳에서 고래잡이 배의 선장은 “진사(秦士)”라고 부른다. 고래잡이는 진나라 사람들이 전해준 기술임이 분명하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신무천황이 바로 서복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주장의 요지다.
일본문명은 신석기시대 말기에서 청동기시대로 진입할 때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데 그 배경에는 도래인들의 활약이 강하게 작용한 특징이 있다.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그런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물론 신무=서복에 대한 반대론도 튼튼한 논거를 갖고 있지만 전국시대와 진통일 시대에 중국인이 꾸준히 일본으로 건너온 사실은 분명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한국 쪽 전설에서는 서복이 불노초를 찾아내서 서쪽(중국)으로 돌아갈 때 출발한 포구가 제주의 서귀포(西歸浦)라는데...여하튼 서복은 절대 권력자의 허영심을 이용해 멋지게 ‘한 건 해먹고 튄’ 인물이며 그 과정에서 한.중.일 여러 곳에 발자욱을 넘긴 인물임이 분명하다.
글 박종일(지혜의 숲 권독사)
#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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