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 [60] 최후의 황군(1) 27년간 밀림속에서 살던 요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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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황군(1) 27년간 밀림속에서 살던 요꼬이
한자에 와전옥쇄(瓦全玉碎: 온전한 기왓장과 부서진 옥)란 말이 있다. 구차하게 살아남는 것(와전) 보다 장렬하게 죽는 게(옥쇄) 낫다는 뜻이다. 태평양전쟁 때에 일본군은 전세가 불리할 때 투항하지 않고 전원이 전사할 때까지 ‘결사항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일본군은 항복을 수치로 여기도록 훈련받았고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오면 극형에 처한다는 법이 있었다. 당시 일본 언론은 전투에 졌을 때 ‘패배’라고 하지 않고, ‘옥쇄’라는 표현을 쓰면서 전원 전사를 은폐하고 미화하고 부추겼다. 이러다보니 1945년 8월 15일에 일본 정부가 정식으로 항복하고 난 후에도 수개월, 수년, 심지어 수십 년 동안 개인으로, 또는 소규모 집단을 이루어 투항하지 않고 버티는 일본군이 있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28년이란 시간이 지난 1972년에 격전지였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미군의 속령이 된 괌 섬의 밀림에서 원주민 사냥꾼들이 옛 일본군 육군하사 출신의 패잔병 요꼬이 쇼이치(橫井莊一, 1915-1997)란 인물을 찾아냈다. 발견될 당시 요꼬이는 오랜 야생생활을 한 탓에 언어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1944년 7월, 미군은 사이판 섬에서 격전을 치르고 승리한 후 일본군의 다른 요새인 괌 섬으로 진격했다. 이때 요꼬이는 투항하지 않고 깊은 밀림 속으로 달아났다. 소총을 도구로 삼아 굴을 파고, 나뭇가지를 꺾어 입구를 가리고 그 속에서 생활했다. 쥐, 개구리, 뱀, 야생과일이 그의 주식이 되었다. 일본이 투항 한 후 미군은 종전을 알리고 투항을 권하는 전단을 공중에서 살포하였고 요꼬이도 이 전단을 보았으나 포로가 되면 귀국 후 극형에 처해진다는 두려움 때문에 27년 동안이나 밀림 속에 숨어 살았다. 귀국 할 때 모여든 기자들을 향해 그가 내놓은 제일성은 “부끄럽게도 살아 돌아 왔습니다”였다. 언론은 그를 ‘최후의 황군 병사’로 치켜세웠다. 요꼬이는 처벌받기는커녕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귀국 후 결혼했지만 결혼생활은 1년 만에 끝났다. 그가 파경에 이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아마도 27년 동안 습득한 ‘야인’생활의 습관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요꼬이는 1997년에 8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일본 군국주의가 만들어 낸 희비극의 주인공이었다. 2004년, 요꼬이 집안과 나고야시 정부가 합의하여 『요꼬이 기념관』을 열었고 2006년부터는 이혼했던 요꼬이의 부인이 이를 넘겨받아 사립으로 운영하고 있다. 기념관에는 요꼬이가 야생생활을 하는 상황이 복원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왜 기념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군국주의는 일본인들에게 아직도 숭상되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 아닐까?
#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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