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 [62] 닮은 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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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한의 수도 서울을 향해 쳐들어왔다. 대통령이란 사람은 서울을 사수한다는 방송을 하고는 일지감치 대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대통령의 말을 믿고 있었던 서울 시민들은 그 방송이 있었던 날 오후에 미아리 쪽에 적군의 탱크부대가 나타나자 서울을 탈출하기 시작했다. 6월 28일 새벽 두시 쯤 한강다리가 폭파되었다. 다리를 건너고 있던 피난민 행렬도 다리와 함께 공중으로 날아오르고 강물 속으로 처박혔다. 한강다리가 끊어졌을 때 서울 일원에는 한국군 총병력의 절반에 가까운 4만4천명 5개 사단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퇴로가 끊긴 이들 부대는 모든 중장비와 중화기를 강북지역에 남겨둔 체 각자도생 방식으로 강을 건너면서 분산되었다. 정부의 무능한 대책에 시민의 분노가 끓어오르자 교량 폭파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이 속죄양으로 군법회의에 넘겨지고 9월에 서둘러 사형이 집행되었다. 1964년에 최대령의 부인이 재심을 청구하였고 재판부는 명령에 따른 작전이었다며 무죄를 선고했으나 폭파명령을 내린 자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 상반기에 일본군은 서주(徐州)대회전에서 우세한 화기를 이용해 24만의 병력으로 60만의 장개석 군을 격파하고 개봉(開封)을 함락시킨 후 계속해서 서쪽으로 진격했다. 중국군은 일본군의 공세를 늦추기 위해 황하의 남쪽 뚝을 무너뜨려 홍수를 일으켰다. 이 홍수로 민간인 가옥 145만 채가 물에 잠기고 1천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89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일본군의 피해는 사상자 1천여 명 뿐이었다. 같은 해 하반기에 중.일군은 무한(武漢)에서 다시 맞붙었다. 중국군은 110만의 병력을 동원하였고 일본군은 35만을 동원하였으나 우세한 화기를 갖추고 특히 제공권을 장악한 일본군이 전투의 주도권을 잡았다. 일본군이 대거 호남성 장사(長沙)로 진격해왔다. 중국군은 진격하는 일본군이 이용할 수 있는 어떠한 물자도 남겨두지 않는다는 이른바 “초토작전”으로 맞섰다. 중국군의 명령으로 장사시에서 한밤중에 수백 명이 수백 곳에서 동시에 불을 질렀다. 도시는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였고 어떤 경고도 듣지 못했던 시민들은 잠자다가 뛰쳐나와 아무것도 지니지 못한 체 피난했다. 이 일로 민간인 사망자는 2천여 명에 불과(?)했으나 3일 동안 지속된 화재로 장사시 건물의 80%가 무너지고 민간인 가옥 5만여 채가 재로 변했다. 전국에서 정부를 성토하는 소리가 높아지자 장개석은 민심을 달래기 위해 장사시 경찰국장과 경찰 간부 몇 명을 서둘러 총살했다. 민심이 떠난 자리에는 중국공산당이 파고들어 확고한 터전을 잡았다.
무능한 지도자가 벌이는 정책은 많이도 닮았다. 그런데 한국정부는 한강 다리를 끊는 정도였지만 중국은 대국이라서 그랬는지 아예 강뚝을 무너뜨려 대규모 홍수를 일으키는가 하면 도시 하나를 그냥 잿더미로 만들어버리는 웅대한 스케일을 보여주었다.
#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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