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 [63] 모내기와 ‘헤이리’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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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와 ‘헤이리’소리
모내기를 준비하는 철이다. 어릴 적의 추억을 더듬어 보면 지금쯤 들녘에는 모판을 준비하느라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요즘은 농사도 많은 부분이 기계화되었다. 나가보면 부산스러워야 할 들녘에는 간간히 농기계가 보이고 기계음만 들린다. 모내기 때만 그런 게 아니라 추수할 때까지 (벼농사의) 전 과정이 조용하게 기계화되었다. 경영학에서 말하는 생산성이야 엄청나게 높아 졌지만 무언가 그곳에 있었던 익숙한 것들의 부재(不在)에 대해 허전함을 느끼게 된다. 내가 사는 파주 탄현면(금산리)의 나이 많은 농부들이 회상하는 옛 농사 모습을 글로 정리하여 아쉬움을 달래본다. 옛일을 알지 못하는 세대에게도 조금 참고할 가치가 있는 기록이 되었으면 좋겠다.
곡우(穀雨) 무렵에 볍씨를 낙종(落種)한다. 모판에 물을 넣어 말갛게 갈아 앉힌 다음에 낙종한다. 그래야 볍씨의 간격을 잘 볼 수 있다. 봄이라 낮에는 바람이 불어 식전에 끝내야 하므로 몇 집이 품앗이로 함께 작업한다(7, 8명가량). 낙종하기에 앞서 논둑에 제물(북어, 막걸리)을 차려놓고 풍년을 비는 제를 올린다. 망종(芒種) 전후 3일부터 하지(夏至) 무렵까지 모를 낸다. 아침 일찍부터 모를 쪄놓고 10시 반쯤에 나오는 참 겸 점심을 먹고 모를 심는다. 모내고 나서 한 달쯤 되면 호미로 애벌김(애낌이라 했다)을 맨다. 애벌김을 매고 나서 10~15일 뒤에 손으로 두벌김을 매고 다시 보름 정도 지나 세벌김(삼동이라 했다)을 맨다. 7월 백중(百中)에 호미씻이를 했다. (음력) 10월에 나무 절구통을 엎어놓고 벼 타작을 한다.
김매는 철이 되면 두레가 선다. 두레꾼은 25명 정도. 나이 많은 동네 어른 한 분을 영좌(領座)로 모시고 영기(令旗)를 세웠다. 기는 흰 바탕의 천에 먹으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세로로 길게 쓰고 양 옆에 일 년 열두 달을 상장하는 지네발 12개씩을 달았다.
두레김 매러 나갈 때, 김 맬 때, 김매고 들어올 때 농악을 하고 농요를 불렀다. 논매러 오고가는 길에 큰말(안말, 금산2리)두레와 헌턱골(죽현1리) 두레가 자주 마주치게 된다. 헌턱 두레가 먼저 꾸며진 영좌 두레라며 절 받으려하고 한편은 절하지 않으려고 해서 두레싸움이 일어난다. 호미씻이할 때는 큰말, 넘말(바깥말, 금산1리), 헌턱골의 3개 두레가 서로 초대해서 함께 즐겼다.
이제는 농악을 하는 일도 없고 농악을 할 줄 아는 사람도 없어지고 농요를 부를 줄 아는 사람도 소수만 남았다. 농요는 받음구와 메김구가 있어 서로 주거니 받거니 부른다.
탄현면 법흥리 성동 사거리에 10여 년 전 ‘헤이리 예술마을’이란 마을이 들어섰다. 그러자 요양원, 유치원, 방앗간, 부동산 개발사업, 유원지, 식당 등 탄현면에는 곳곳에 ‘헤이리’란 이름이 붙었다. 그 뜻이 무언지도 모르면서 다들 이곳저곳에 끌어다 붙여 쓰고 있다. 그 마을에 사는 주민들은 자기 마을이름의 뜻과 유래를 알고 있을까? ‘헤이리’는 사실은 금산리 농요(‘헤이리소리’)의 받음구의 한 부분이다. 사라져가는 농요가 이렇게라도 흔적을 남겼으니 다행이다. 여기 적어서 알리고자 한다.
“에-에헤 /에 헤이 어허 야 /에 헤 에엥 헤이리 /노 호 오 야”
#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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