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 [64] 대통령선거와 TV토론
수정 : 0000-00-00 00:00:00
대통령선거와 TV토론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이번 선거는 우리 역사에 여러 가지 중대한 의미와 흔적을 남길 것이다. 만족하든 불만이든 누구에게나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번 선거의 운동방식 가운데서 중요한 변화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TV토론이 유권자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TV토론은 언제부터 선거운동의 방식이 되었을까? 이 방면에서는 역시 미국이 ‘선진국’이다.
1960년은 미국 정계의 선두그룹이 대폭 교체된 해로 기억된다. 아이젠하워나 트루먼 같은 늙은 세대가 퇴진하고 “뉴프런티어”를 내건 케네디와 “새로운 닉슨”을 내건 닉슨 같은 젊은 그룹이 전면에 등장했다. 공화당계 백만장자들로 채워진 내각을 이끌고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임시방편으로 덮고 넘어가기를 선호하든 전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후배들에게 적지 않은 난제를 넘겨주고 떠났다. 소련이 세계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고 호전적인 흐루시초프 수상은 위협적인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흑백 통합교육 때문에 미국은 분열되어 있었고 머나먼 베트남의 밀림 속에 미군 고문관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미국은 과감하고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했다. 닉슨(46세)도 케네디(43세)도 젊은 후보였다. 그리고 두 후보 모두 진취적인 공약을 들고 나왔다. 그런데 닉슨은 아이젠하워 밑에서 두 번이나 부통령의 경력을 쌓았으니 요즘말로 하자면 “준비된 대통령”쯤 되었다. 여론조사도 닉슨이 약간 우세했다. 하지만 선거결과는 케네디의 당선이었다.
닉슨의 중요한 패인의 하나는 바로 TV토론의 열세였다. 이 때의 선거에서 TV 토론이 처음으로 선거 운동방식으로 등장했다. 첫 번째 토론은 1960년 9월 26일 시카고에서 방송되었다. 6백만 명의 미국 시민이 토론내용을 들었다. 라디오 중계를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닉슨이 이겼다고 생각했다. TV를 지켜본 사람들은 케네디가 이겼다고 생각했다. 케네디는 젊고 패기 찬 모습이었지만 닉슨은 지치고 나이든 모습으로 비쳤다. TV방송을 지켜본 닉슨의 어머니가 닉슨에게 아프냐고 묻는 전화를 걸 정도였다. 분장의 잘못이었다.
그 뒤로 세 차례나 더 TV토론이 있었지만 유권자는 첫 번째 토론이 준 강렬한 인상만 기억했고 라디오방송 보다는 TV방송이 유권자를 훨씬 더 많이 불러 모았다. 이 때의 선거는 미국역사에서 투표율 60%를 넘긴 마지막 선거였다. 선거인단 숫자에서는 케네디가 303:219로 이겼지만 유권자 투표에서는 케네디가 119,450표(총투표수의 1%의 1/10에도 못 미친다)만 앞섰다.
여담 한마디. TV토론 이후 케네디가 어디로 유세를 가든 그가 묵는 호텔에는 젊은 여성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아침 일찍 그의 방에서 살며시 나와 사라지는 금발 머리의 여인이 언제나 있었다.
#65호
신문협동조합「파주에서」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