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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67] 독재자의 아들

입력 : 2017-07-02 21: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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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의 아들

▲ 지역주민과 이야기나누고있는 장징궈


모택동 공산당 군대와의 내전에서 패배한 장개석 국민당 군대는 대만 섬으로 옮겨가 하나의 작은 정권으로 몰락했다. 그 때 국민당에게는 두 개의 정치적 명제가 있었다. 하나는 대륙 정권과의 관계에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절박한 처지였고, 다른 하나는 원래 아무런 정치적 기반을 갖지 않았던 대만에서 어떻게 정권의 안정을 유지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두 가지 난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철저한 국민당 일당체제의 기초 위에 장개석 일인독재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반공 이데올로기를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부끄러운 과거가 있지만 대만은 그 점에서 우리보다는 훨씬 더 절박한 상황에 놓였었고 따라서 대처 단수도 훨씬 더 높았다. 국민당이 대만 섬으로 옮겨온 1949년부터 1987년까지 40년 가까이 대만은 계엄령 하에 있었다. 이 시기를 ‘백색공포의 시대’라고 부르는데, 공산주의(또는 대륙)와 관련되었다는 약간의 의심만 사도 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우리는 그래도 엉터리이나마 사법절차의 외피는 지키려 했다는 점에서 조금 낫다고 할 수 있다).

 

독재자 장개석(1887~1975년)은 죽기 전 아들 장경국(1910~1988년)에게 후계자 수업을 철저히 시켰다. 장경국은 아버지의 후광을 바탕으로 하여 국민당과 행정부를 장악했고 아버지 사후에 곧바로 대만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그런데 장경국은 청년 시절(1925년부터) 모스크바의 중산대학에서 공부했고 소련 공산당 당원이 되었으며 충실한 공산당원으로 살았다. 한때는 공산주의자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중국 통치를 비난하고 부인하는 성명을 공개적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장경국은 1937년에 소련생활을 정리하고 아버지 곁으로 돌아왔다. 여러 가지 곡절을 겪으며 아버지와 국민당 체제에 타협하고 적응했다. (지면 관계로 여기서는 더 언급할 수 없지만 등소평과 장경국은 중산대학 동창생이었고 두 사람은 훗날 같은 시기에 대륙과 대만에서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올랐다. 장경국은 귀국할 때 러시아 여자인 아내와 그 사이에서 난 아들과 함께 왔다).


▲ 별세하기 3개월 전인 1987년 10월 10일 신해혁명 기념일(통칭 쌍십절)에서의 모습

 

장경국은 최고 실권자가 된 후에 대만의 정치 경제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개혁과 변화를 추구했다. 그는 ‘행정원장’이 되고서(1972년) 10대 경제건설 정책을 시행하였고 그 결과 대만은 이른 바 ‘아시아의 네 마리 용(한국, 대만, 홍콩, 싱가폴)’의 하나로 부상했다. 국가 행정의 간소화와 부패척결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정치와 사회 혁신’ 8대 과제를 실천하여 다당제를 도입하고(그 결과 지금의 민진당이 생겼다), 언론 출판에 대한 통제를 없앴고, 대륙과의 교류를 시작했고, 가장 중요한 것은 38년 만에 계엄을 해제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대만은 이렇게 그의 리더쉽 아래서 틀을 갖추었다.

 

장경국은 독재자의 아들로서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추종하거나 복원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는 대만 사회가 미래로 나아갈 길을 알았고, 그 것을 정치에 충실히 반영하려 했고, 그리고 성공했다. 지금도 대만의 역대 정치지도자에 대한 인기도 조사에서는 그가 1위를 차지한다.

 

최근에 우리는 대통령을 탄핵했는데 반드시 자랑스럽게만 생각할 수 없는 일면도 있다. 법정에 선 전직 대통령을 보면서 장경국을 생각해 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여담 하나: 장경국은 1966년에 대만 국방부장관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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