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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농부 희고니의 텃밭일기<25> 눈길 함부로 걷지 말지어다

입력 : 2018-03-01 15:23:00
수정 : 0000-00-00 00:00:00

눈길 함부로 걷지 말지어다




가는 겨울이 아쉬워 눈이 내렸다. 날이 춥지는 않아 큰길의 눈들은 다 녹았다. 이장은 아침 댓바람부터 방송을 하고 있었다. "아아 이장입니다. 서룡리 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밤새 눈이 겁나게 많이 와 부렀습니다. 마을 고샅의 눈들을 치워야겠습니다.  한집당 한사람씩 나와서 자기집 앞의 눈들을 치워 주시기 바랍니다."  이장은 감기가 걸린 목소리로 동네 사람들을 다그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밥도 지어야 하고 소죽도 쑤어야 해서 자기집 마당의 눈도 겨우 한사람 다닐 만큼만 치워 놓았다. 측간으로 통하는 문만 길이 나 있었다.

양촌양반은 잠이없어 새벽 네시면 일어나 소죽을 쑤었다. 귀가 잘 안들리는 관계로 라디오를 크게 틀어 놓았다. 어쩌다 친구들이랑 놀다가 잠이들면 어김없이 라디오가 잠을 깨웠다. 귀를 막고 이불을 뒤집어 쓰다가도 그냥 일어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양촌양반 매일같이 술에취해 고주망태가 되고 전봇대에 옷을 걸치고 잠이들면 아들이 떠매고 간적이 많았다. 가끔은 시커먼 거시기까지 꺼내놓고 코까지 골면서 잠을 자기도 했다. 알콜성 치매로 십여년을 고생하다가 돌아가셨다는 소문이 봄바람처럼 들려왔다.

아침을 먹고 아이들이 하나둘 모였다. 손에는 비료푸대를 하나씩 들었다. 비료푸대 속에 짚을 넣은 아이들도 있었다. 동네 입구 오르막에는 금새 눈썰매장이 설치 되었다. 두시간은 충분히 타고 남을 만큼 눈이 내렸다. 남쪽 지방은 해가 나면 금새 눈이 녹기 시작한다. 봄방학을 맞은 동네 아이들이 모두 나왔다. 어른들도 타고는 싶었지만 차마 체면상 탈 수없어 서운한 눈치가 역력했다. 대신 사랑방에 모여 화투나 놀음판을 벌었다. 거기에 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새끼를 꼬거나 망태기를 만들기도 했다.

이장의 방송 효과인지 아니면 원래 시골 사람들의 근면 정신인지 몰라도 마을 안길의 눈은 모두 치워지고 길에서 넘어졌다는 노인들은 없었다. 혹시라도 넘어질까봐 고무신에 짚세기를 묶고다녔다. 가끔 털신을 신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지만 신발에서는 고랑내가 한겨울을 괴롭혔다. 눈이 와도 산속에서 솔가지 나무를 베어오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런다고 그리 잘 살지는 못하더라. 열심히 사는 것보다 잘 사는것이 중요 하더라는...눈길 함부로 걷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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