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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㊳ 엘긴 대리석(1)

입력 : 2016-04-15 14: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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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긴 대리석(1)

 

 서구문명의 정신적 바탕은 그리스-로마 신화와 기독교 교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 신화를 생각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파르테논 신전을 떠올리게 된다. 정작 아테네를 가본 적이 있는 여행객이라면 파르테논 신전의 훼손된 모습에서 비애와 절망을 느낄 것이다. 자연의 변화가 신전을 훼손시킨 것은 당연한 이치이지만 그보다도 인간의 손길이 끼친 피해가 훨씬 더 컸다. 지금 그리스 영토의 대부분은 15세기부터 19세기 초반에 이르는 오랜 세월동안 오스만 터키제국의 속령이었다.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겨루고 있던 오스만 터키와 베네치아는 수시로 전쟁을 벌였고 이때 오스만 터키는 파르테논 신전을 군대의 무기고로 사용했다. 1687년 베네치아 함대가 파르테논 신전을 포격해서 심각한 피해를 입힌데다가 조각품들을 거친 방법으로 약탈해가면서 많은 대리석 조각품을 박살내 놓았다.

 

 토마스 브루스(1776-1841)는 오스만 터키 주재 영국대사를 지냈다(1798-1803). 세간에서는 귀족인 그의 세습영지의 이름을 따서 그를 (제7대) 엘긴(Elgin) 백작이라 불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오스만 터키의 술탄으로부터 파르테논 신전을 위시한 그리스의 여러 신전의 구조를 측량하고 그곳의 작품을 그림으로 남기는 작업을 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벌인 일은 현지 관료에게 뇌물을 주고 대리석 작품을 뜯어내는 것이었다. 되는대로 뜯어내고 선편으로 영국에 보내기 편리한 크기로 절단된 작품들은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상, 박공의 부조, 건축 장식의 절반에 이르는 양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옮겨진 작품들은 스코틀랜드에 있는 토마스 브루스의 장원 저택을 장식했다. 운송 도중에 배가 침몰하여 바다 밑에 갈아 앉은 대리석 작품들을 끌어올리는데 수년이 걸린 경우가 있었고 그가 귀임한 후에도 그가 고용한 전문가들은 현지에 남아 1812년까지 발굴(?) 작업을 계속했고 성과물들을 영국으로 보냈다. 당시 영국 시인 바이런은 브루스의 행위를 문화파괴(vandalism)라고 비난했다.

 

 부채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엘긴 백작은 1816년에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파르테논(등의) 조각품을 영국 정부에 팔았다. 이것이 이른 바 ‘엘긴 대리석’이다. 세계 최고수준, 최대량을 자랑하는 대영박물관의 그리스 고대 조각품 콜렉션은 이렇게 하여 모아졌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대영박물관에서 손발이 잘려나간 신상과 몸통이 없는 말머리 조각상을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글 박종일(지혜의 숲 권독사)

 

 

 

#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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