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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㊴ 엘긴 대리석(2)

입력 : 2016-04-29 13: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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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긴 대리석(2)

 

"어느 여름날, 두 명의 강도가 여름 궁전에 침입했다. 한 명이 물건을 깨끗이 쓸어 담는 동안 한 명은 불을 질렀다. 승리자들은 여름 궁전의 보물을 모조리 훑어갔고 훔친 물건은 나누어가졌다. 승리자들이란 원래부터가 강도로 변하기 마련이다." 프랑스의 저명한 작가 빅토르 위고가 말한 두 명의 강도란 영국과 프랑스를 가리키며, "여름 궁전"이란 바로 중국의 원명원(圓明園)이었다. 1860년 10월, 영·불연합군이 저지른 야만적인 원명원 약탈과 방화는 인류문명사에서 가장 야만적인 문화재 약탈사의 하나이다.

 

원명원은 북경 서쪽 교외에 자리 잡고 있으며 청 황제의 별궁이었다. 옹정(雍正帝), 건륭(乾隆), 가경(嘉慶), 도광(道光) 등 여러 황제가 150년 동안 사용하면서 지속적으로 수리하고 확충하여 규모가 웅대하고 경치가 수려한 별궁으로 만들었다. 청의 황제들은 여름과 가을이면 더위를 피해 이곳으로 와 정무를 처리했다. 이곳에는 황제가 아끼는 고전서적과 서화가 다량 소장되어 있었음은 물론이고 건축적인 면에서도 최고의 기술을 구사하고 서양 선교사들이 설계한 서양식 건물까지 갖춘 조경예술의 극치라고 할 수 있었다.

 

제1차 아편전쟁 이후로도 아편교역의 확대, 자유로운 선교, 개항장의 추가를 바라던 영국은 프랑스를 끌어들이고 사소한 꼬투리(애로우호 사건)를 잡아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의 말미에 청 정부의 항복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영.불연합군은 원명원을 불태우기로 결정했다. 10월 8일, 먼저 약탈이 시작되었다. 장교들에게는 약탈의 우선권이 주어졌다. 그들이 지나간 후 병사들에게 “자유롭게 약탈”해도 좋다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고 나서 방화명령이 내려졌다. 원명원은 타지 않는 돌만 빼고 모든 것이 재로 변했다. 지금도 원명원 옛터에는 그때의 방화에서 살아남은 대리석 더미만 남아있다. 현재 영.불 양국의 주요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중국관련 보물들은 이때 약탈된 것들이 많다.

 

연합군의 원명원 약탈과 방화를 주도적으로 구상하고 적극적으로 실행한 책임자는 영국의 전권 특사 제임스 브루스(James Bruce, 1811-1863)였다. 그는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조각 작품을 휩쓸어간 토마스 브루스의 아들이며 아버지의 작위를 세습하여 제8대 엘긴백작이 되었다. 아버지는 서양 고전문명의 핵심적 상징의 하나인 파르테논 신전을 약탈했고 아들은 중국 문명과 권력의 핵심 상징의 하나인 원명원을 약탈했다. 부자가 대를 이어가며 동서양의 핵심 문화재를 약탈한 덕분에 대영박물관의 수장고가 넉넉해졌던 것이다.

 

 

 

글 박종일(지혜의 숲 권독사)

 

 

 

#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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