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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㊷ 중국의 유태인

입력 : 2016-06-10 12: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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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유태인

 

중국 내부의 역사기록에 유태인의 존재와 활동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북송시대인데 궁중에 양포(洋布)를 공급하여 황제가 좋아했다고 한다. 당시 유태인 대부분은 송의 수도인 지금의 하남성 개봉에 모여 살았다. 유태인이 중국에 들어온 것은 그보다 앞선 당 시대로 추정하는데 돈황 천불동에서 8세기 무렵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히브리어 상업문서와 유태교 기도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중국내 유태인의 존재가 외부세계에 처음 알려진 것은 베니스의 상인 마르코 폴로(1254~1324)와 모로코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1304-1368)가 쓴 여행기를 통해서였지만 내용은 매우 간략했다. 중국내 유태인의 존재를 상세하게 기록하여 서방에 알린 인물은 우리가 잘 아는 마테오 리치(1552~1610)이다. 중국에서 28년 동안 기독교를 선교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마테오 리치가 남긴 “기독교 중국원정사”란 책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605년의) 어느 날 애전(艾田)이란 중국 유태인 청년이 리치 신부를 찾아왔다. 그는 중국학자가 쓴 책을 통해서 리치 신부의 활동을 알게 되었으며, 자신은 유일신 여호와를 믿으며 개봉에 사는데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북경에 왔다고 하였다. 리치 신부가 그에게 성모자상을 보여주자 유태인 청년은 그것을 구약에 나오는 레베카와 그의 아들 야곱 또는 에서로 이해하고 무릎 꿇고 경배했다. 히브리어로 된 성서를 보여주자 청년은 그것을 해독하지는 못했지만 히브리어임은 알아봤고, 자신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중국 전적을 공부했지만 자신의 가족들은 히브리어를 사용한다고 말했다. 청년은 Messiah를 Moscia로, Jerusalem을 Jerusolaim으로 읽었다. 그리고 개봉에는 많은 유태인이 살고 있고 유태교 교당도 있다고 알려 주었다. 후에 리치 신부가 중국인 조수를 개봉으로 보내 확인한바 청년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개봉의 유태교 교당은 1642년 이자성(李自成)의 반란군이 개봉을 공격하면서 황하 제방을 무너뜨릴 때 물어 잠겨 없어졌고 이 때 유태인 사회도 많이 흩어졌다. 1850년에는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 개봉의 유태인 사회는 큰 핍박을 받았다. 그해에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마지막 랍비(유태교 성직자)가 죽자 이후로 유태인 사회는 유태교도로서의 정체성을 잃어갔다.

 

1987년 통계에 따르면 개봉의 유태인 후손은 66호 159명이다. 이들은 스스로는 유태인의 후예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히브리어는 모르고 유태교의 전통도 알지 못한다고 한다. 어쨌든 지금까지 유태인 사회가 천년을 넘기며 중국내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대단한 일이라 할 것이다.

 

   

 

글 박종일(지혜의 숲 권독사)

 

 

 

#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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